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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박연 이야기, 사극 뮤지컬 '낭만별곡' 3월 초연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청년 세종의 모습과 악성 박연을 만날 수 있는 뮤지컬이 개막한다. 제작사 파크컴퍼니는 뮤지컬 '낭만별곡'을 3월 19일부터 6월 9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스24아트원 2관에서 공연한다고 7일 밝혔다. '낭만별곡'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하는 '2022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스토리 부문에서 111:1의 경쟁력을 뚫고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다. 조선시대 음악이라는 소재에서 주는 독창성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낭만별곡'은 세종 즉위 전 청년 이도 시절 악기 연주를 즐겼다는 태종실록의 기록을 모티브로 세종과 함께 조선 음악의 근간을 세운 박연이라는 실존 인물로 상상력을 더한 팩션 사극이다. 조선시대 음악 기관 장악원의 전신인 이원에 모여든 이들이 신분, 성별, 나이에 관계 없이 음악으로 하나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은 '청년 세종' 이도, 조선 음악의 기틀을 세운 박연 등 실존 인물과 함께 예성과 동래라는 허구적 인물이 이야기를 이끈다.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이원에 들어가는 이도 역은 뮤지컬 배우 이종석, 반정모, 김우성이 맡는다. 갑작스레 이원으로 발령받아 악사들을 관리하게 된 박연은 박유덕, 장민수가 연기한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 남장을 하고 이원으로 들어온 예성 역에는 전하영, 박주은이 출연한다. 천민 출신으로 나만의 음악을 들려주고자 악사가 된 동래는 황두현, 정백선, 정지우가 맡는다. 이원을 상징하는 배꽃을 의인화한 인물인 '무용'은 유다혜와 배상경이 캐스팅됐다. 신재아 작가의 글을 한국뮤지컬어워즈 극본상을 받은 박해림 작가가 뮤지컬 대본으로 제작했다. 김은영이 작곡·연출·음악감독을 맡았으며 신선호가 안무감독으로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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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무형유산전수교육관서 어린이 겨울방학 특강세종시는 어린이들에게 전통문화 가치를 알리기 위해 박연문화관 내 세종무형유산전수교육관에서 오는 31일부터 4주간 겨울방학 특강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하고 12∼19일 수강생을 모집한다고 10일 밝혔다. 개설 강좌는 가야금 산조 및 병창, 판소리(흥보가), 용암강다리기, 평북농요, 산타령, 가곡, 매듭장을 활용한 9개 프로그램 등이다. 수강하면 지역 국가무형유산 가야금, 시무형유산 용암강다리기·판소리 보유자(보유단체) 및 다양한 종목 이수자로부터 직접 전통 무형유산을 배울 수 있다. ☎ 044-300-5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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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스승을 기리는 진도북놀이 합동 추모공연지난 9일 진도군북놀이보존회(회장 이희춘) 주최 주관으로 진도북놀이 합동 추모공연이 진도군무형문화재전수관에서 개최되었다. 진도북놀이 3개류 합동 추모공연은 다음 5분 스승에 대한 추모제이다. 고 장성천 선생님 30주기 고 양태옥 선생님 20주기 고 박관용 선생님 15주기 고 김관우 선생님 10주기 고 김길선 선생님 9주기 다섯 분의 예능보유자 스승님을 모신 합동추모행사는 처음이다. 그간에 고 박관용선생님 보존회에서 14주기 동안 매년 추모행사를 개최해 왔다. 올해는 문화진흥기금 사업으로 합동추모제 및 공연을 갖게 되어 더욱 뜻깊은 날이다 많은 지인과 문하생 특히 장성천 스승님 유가족과 원로 제자분들이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무형문화재 제19호 '만가' 예능보유자 김기선.오주창 두분께서 잔을 올려 생전에 나누었던 두터운 정을 보내는 순간이다. 초헌은 김병천 보유자와 보존회원이, 아헌은 박강열 보유자와 보존회원이, 종헌은 이희춘 보유자와 보존회원이 헌작을 올렸다. 스승에게 잔을 올리며 마주 본다. 그리운 마음이 바다처럼 밀려온다. 제자들이 준비한 추모공연에서 3개류 진도북놀이는 그 어느때 북소리보다 마음을 크게 울린다. 북에 힘이 실리고, 마음이 실려 울려 퍼지는 공명에는 온 천지가 울린다. 이 아름다운 북소리로 꽃을 피웠으니 어찌 다섯 분의 영가께서 기뻐하지 않으셨겠는가? 스승님들도 어느새 나비가 되어 북과 채를 들으셨다. 사뿐사뿐한 발사위 총총걸음으로 팔을 하늘을 향해 들었다 내려 놓는다. 오늘은 이렇게 먼저 가신 스승과 진도북춤의 신명과 흥으로 대화를 주고 받는 날이다. 그리고 스승님의 왕생극락과 명복을 올리는 날이다. 무형문화유산 진도북춤이 다음 세대에서도 온전히 계승할 수 있도록 천지신명께 비옵니다. 반주에는 김영순(쇠),최미령(징), 노준영(장고),정창조(태평소), 진도북춤은 신필순,박연희,류은경,정은아 회원이 추모 공연을 올렸다. (진도군북놀이보존회 이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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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동포와 함께한 '향두계놀이', 그리고 유지숙과 박애리 명창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가 주최하고 향두계놀이보존회(이사장 오현승)가 주관하는 서도소리극 '향두계놀이'가 2일 경기도 양주문화예술회관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향두계놀이’는 북한 평안도에서 전해지는 두레정신을 담긴 마을공동체 결속을 다지는 전통놀이 연희극으로 서도소리와 평안도 지역 고유한 대동놀이를 대표하는 민속놀이다. 1966년 전국민속놀이대회에 나가면서 민속예술성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이날은 향두계놀이보존회는 경기도 양주시와 파주시에 정주하고 있는 사할린동포 100여 명을 초대한 특별한 공연이었다. 갑자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양주 율정마을 시민들이 1층 객석이 꽉 채웠다. 마을의 안녕과 풍작을 기원하는 마을제 길놀이, 북청사자놀음, 고유제 무대가 오르기 전 농악대가 객석 뒤에서부터 좌우로 갈라져서 '지신밟기'를 펼치는 길놀이를 보여주었다. 이 나라 이 땅을 지키는 동서남북 신에게 공연의 시작을 알리고 안전과 태평을 기원드리는 마당굿을 올렸다. 꽹가리, 징, 장구, 북소리가 높이높이 메아리쳤다. 이어서 눈처럼 하연 사자탈을 쓴 연희자들이 나타나서 북청사자놀음이 시작되면서, 곧이어 꼭두쇠의 익살과 재담으로 '향두계놀이'의 시작을 알렸다. 400여 명의 청중은 꼭두쇠가 가르쳐 준 추임새 학습을 받고 '잘한다' 하며 맛깔스런 재담에 우뢰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본 무대가 시작되었다. 무대와 객석의 조명이 일제히 꺼지고 잠시후 무대 왼쪽에 조명이 차차 밝아졌다. 유지숙 보유자가 나타나서 무릎을 꿇고 마을을 지키는 당목 아래에서 정화수를 바친다.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우고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고축(고유제)를 올렸다. 무녀로 분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악귀와 잡신을 물리치고 마을의 안강과 풍작 및 가정의 다복을 축원하는 신앙적 의례를 재현했다. "일년은 열두달 삼백은 예순날/ 황도 길일 좋은날 잡아서/ 오늘 열손 모아 비나이다" 서도소리의 백미, 수심가, 긴아리, 자진아리 서도소리는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서도 지방)에서 전승되던 노래를 말한다. 민요·선소리·잡가 등을 포함한다. 널리 알려진 민요로는 평안도의 ‘수심가’ ‘긴아리’ ‘자진아리’, 황해도의 ‘자진염불’ ‘긴난봉가’ ‘자진난봉가’ ‘몽금포타령’ 등이 있다. 얇게 떠는 목을 구사하면서 콧소리가 특징이다. 긴아리는 빠른 한배의 '자진아리'와 짝으로 불린다. 현재 서도소리 보유자로 지정된 김광숙과 이춘목 명인, 전승교육사 유지숙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수심가'는 남도민요의 대표적 '육자배기' 와 쌍벽을 이루는 민요이다. 그만큼 우리 민족이 아리랑만큼 사랑하고 애창하던 구전민요이다. 그래서 서도소리의 백미라고 불린다. 유지숙 명창의 수심가는 한번 들으면 다시 한번 더 듣고 싶어진다. 애절함이 극치에 달하면서 치유가 되는 '노래의 힘'이 느껴진다. 공연이 끝나고 나가면서 사할린 동포들이 이 곡의 제목을 물어보았다. 명곡은 시대를 넘나들고 공간을 초월한다. 일제감점기 음반과 방송을 통해 전국 랭킹 1위 유행가가 바로 수심가이다. 1926년 영화주제가 '아리랑'이 나오기 전까지 민중이 애창한 민요이었다. 인생 일장춘몽(一場春夢)이요/ 세상 공명(功名) 꿈밖이로구나 생각을 하니, 세월이 가는 것/동달아 나 어이 할거나(수심가) 향두계놀이보존회의 각 지역 지부장과 경·서도소리로 활동하는 이들이 모여 서도소리극을 올렸다. 풍물 반주는 꽹과리(1)·징(1)·장구(2)·북(1)으로 구성된다. 향두계놀이 전 과장은 마당 준비과정, 입장, 도리깨질소리. 모심기 준비 과정, 모찌기 및 모심기, 논두렁 밟기, 초벌 논매기, 새참 가래질 소리 및 연기 피우기, 만벌(세벌) 논매기,풍년 기원 두레놀이 12과장이다. 제1장 '씨앗 뿌리기'과장에서 '긴아리'에 이어 '자진아리'가 불려진다. 야 조개는 잡아서 저절 절이구/ 가는 님 잡아서 정들이잔다(긴아리) 아이고 아이고 성화로구나(후렴) 요놈의 종자야 네 올 줄 알고 썩은/ 새끼로 문 걸고 잤구나 일하든 오금에 잠이나 자갔디 /재넘어 털털 뭘하래 왔음나 울넘어 밖에서 꼴베는 총각아/ 눈치나 있거든 이떡을 받아라(자진아리) 제4장 모내기하는 일꾼들이 새참과 막걸리로 지친 몸을 쉬면서 향두계놀이를 시작한다. 서도소리 ‘청춘가, 개성난봉가, 양산도, 개타령 등이 불린다. 박연폭포 흘러가는 물은/ 범사정으로 감돌아 든다 에 에헤야 에헹에루화 좋구 좋다/ 어럼마 디여라 내 사랑아(후렴) 월백설백 천지백하니 산심/ 야심이 객수심이로다(개성난봉가) 전 회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서도소리가 담긴 '향두계놀이'를 신명과 흥으로 표출시켰다. 특히나 어린 학생들이 신명나는 춤사위와 함께 빠르게 내지르는 청아하고 맑은 서도소리는 잠시나마 궂은 세상살이를 잊게했다. 국악인 박애리의 빛나는 진행 국악인이면서 방송인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박애리 명창의 맛깔스런 평안도 사투리로 진행하는 역활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공연이었다. 아직 전 국민 대상으로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한 국악은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제한적 접근성이 문제인데, 박애리는 이러한 난관을 해결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국악 장르는 갈래가 복잡하고 곡명이나 작품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는 쉽지않다. 해설하는 내용이 명확해야 전달력이 높아진다. 빛나는 진행 솜씨로 향두계놀이 공연을 매끄럽게 마무리했다. 정확한 발음과 발성으로 청중을 집중시켜서 다음 나오는 작품의 진가를 높여주었다. 타고난 말솜씨가 재담가 수준이어서, 시원시원한 평안도 사투리 실력은 관중들의 집중력을 배로 증가시켰다. 즉흥적 대응과 교감이 느껴졌다. 그만큼 철저한 준비를 해 온 성의가 빛을 발했다. 맨 뒷자석 관중들은 아예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보냈다. 국악인이면서 문화매개자의 역활을 톡톡히 보여 주었다. 특히 무대에서 내려와서 한바퀴를 돌면서 가슴을 울리는 목소리로 "오늘 아주 특별한 손님을 모셨습네다. 객석 불을 밝혀주시라우요. 안녕하십니가요. 사할린에서 오신 동포 어르신들 어디에 계시나요. 손을 들어보시라우요. 우리 어마니 아바지." 하고 사할린 동포들을 찾아가서 눈을 마추치고 악수를 하고, 머리를 맞대고 인사를 드려서 폭풍 박수를 받았다. 방송인 박애리 명창은 이미 사할린 동포들에게도 트롯트 가수들(?)의 인기를 넘나드는 스타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어느 무대에서도 소통이 가능한 전무후무한 국악전문 진행자이면서 차세대 국악을 보증하는 스타이다. 오늘 무대는 성공적이다. 이미 꽉찬 관중석의 뜨거운 박수와 무대에 꽂쳐버린 눈길이 말해준다. 오늘 박애리 명창이 역시 기대 이상으로 단단히 한 몫을 하고도 남았다. Q.유지숙 회장님 '향두계놀이' 전국 순회공연을 하시면서, 지금은 북한에서 잊혀진 북녁의 '서도소리'를 극으로 만들어서 알리고 계시는데, 많은 보람이 있으시죠. A. 오늘이 마지막 공연이라는 무대라고 생각하고 우리 모두 열심히 불렀습니다. 특히 오늘은 더욱 뜻깊은 공연이었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이 70년 만에 귀국해서 한국에서 사신지가 15년이나 된다는 것은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북쪽에 본관을 두신 실향민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순회공연 하는 지역과 연계해서 사할린 동포들을 모시고 싶습니다. 다음 강화도 공연에는 인천에 사시는 동포들을 모시고 싶어요. 유지숙 명인은 2018년 광복절 사할린강제징용 80주년 남·북·러 합동공연을 위해 국립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 연희자와 함께 남한 국악인을 대표해서 사할린 무대에 섰다. 당시 필자도 사할린주한인협회 초청을 받고 참석하였는데. 공연을 시작하기도 전, 무대 뒤에서 유지숙 명인을 만나서 "오늘 아리랑을 부르시나요" 하고 물으니, 첫 곡 선정 변경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아리랑메들리에서 북한지역 민요 '서도소리'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음악은 빠른데 서도소리 중 무슨 곡을 불러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당시 2시간 동안 진행된 공연을 통해 러시아 동포들이 좋아하는 장르의 노래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오늘 공연의 진객, 사할린동포들은 러시아에서 태어나서 성장해서 차이코프스키 음악과 발레를 보고 자란 세대이다. 주말이 되어 공연을 보러가는 날에는 넥타이를 메고 붉은 장미꽃 한송이를 들고 가는 것이 일상이다. 주로 1941년에서 1945년 사이 출생한 사할린1세(법적)이다. 빠른 음악과 스텝에 익숙한 청중으로 살아오다가 15년 전에 한국에 귀국한 사람들이다. 전통국악보다는 트롯트에 익숙한 청중이다. 그래서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Q.권경석 회장님, 오늘 북녁 사람들이 애창했던 서도소리극 '향두계놀이' 어떻게 감상하셨나요 A. 태어나서 서도소리는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청아하고 맑은 소리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예술성이 너무나 뛰어난 민족입니다. 이렇게 작은 땅에 살면서 북쪽과 남쪽의 소리가 이렇게 다르다니, 전 세계를 매혹시키는 한국 가수들의 뿌리는 바로 전통의 소리에서 나왔다는 게 실감납니다. 유지숙 명인이 부르는 서도소리는 북녁 사람들의 심장 소리라고 하면 표현이 될까요. 누가 들어도 유지숙 명창의 소리는 하늘이 낸 소리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전통민요라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잊혀져가는 전통의 소리를 남한에서 보존하고 계승하고 있는 것이 다행입니다. 오늘 품격 높은 공연을 선사한 향두계놀이보존회 회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오늘 박애리 명창이 사할린 동포들을 무대에서 소개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잊지못할 공연이 될 것 같습니다. 권회장은 사할린에 태어나서 북한에 유학을 가서 3년간 공부를 하고 모스크바에서 살다가 한국에 영주귀국했다. 대부분 사할린 동포들은 러시아에서 평생 유럽음악을 접하고 온 분들이다. 아마도 우리 전통민요는 다소 생소한 장르이지만 오늘 무대에서 'K-한류'의 원천을 맛보고 가셨으리라고 본다. 공연장을 나오면서 내내 오늘 공연을 통해 우리 전통 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라고 한다.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오늘 공연이 사하린1세 가슴에 잠재되어있는 한민족 밑바닥에 깔린 심성을 건드렸나보다. 우리 민족의 높은 예술성을 실감하고 가슴에 담아갔다고 본다. 전날 전 출연자가 하루종일 리허설을 하면서 이 무대 동선을 익히고 조명 및 음향이 맞아 떨어져서 공연의 완결성을 이끌었다고 본다. Q. 최나타샤(사할린아리랑합창단장) 회장님, 오늘 공연에서 어떤 노래가 가장 가슴에 남나요. A. 작곡가인 남편하고 같이 못와서 아깝네요. '수심가'라는 노래가 가슴을 울립니다. 슬프고도 아름답다고 할까요. 집에 돌아가서 유지숙 명창의 서도소리 공연 동영상을 찾아서 남편과 같이 보고 나니 "우리나라 젊은이들 노래 잘하는 세계적 스타가 앞으로 계속 나오고 있다. 재주있는 민족이다라"고 합디다. 그리고 아침방송에 나오는 박애리 명창이 평안도 사투리 말도 또박또박 잘하고 설명을 잘해주어서 우리가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노래도 잘하고, 역시 최고입니다. 박애리!! 만나고 싶은 스타이었는데, 다음에는 꼭 사진 한장 남기고 싶어요. 우리 부모님은 북한땅에서 살다가 사할린에 이주하여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북한 노래를 들으니 평생 고향에도 못가보고 사할린에 묻히신 부모님과의 추억도 떠오릅니다. 늘 흥얼흥얼거리며 부른 노래가 바로 북한 전통민요였다는 것도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내년에도 우리는 이 공연을 기다리겠습니다. 유지숙 회장님. 귀한 공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나타샤 단장은 러시아 극동 최고 도시 하바롭스크한인협회에서 부회장을 30년 하다가 14년 전에 양주시에 영주귀국하여 부회장을 계속 맡고 있다. 남편은 사할린 동포 중 유일한 작곡가이다. 현재 사할린아리랑보존회장을 맡고 있다. 하바롭스크와 한국과의 문화행사에서 동시통역을 맡고 있다. Q.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님, 오늘도 주말에 먼길 시간내서, 늘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해주시네요. A. 사할린 동포들 이제는 연로하시고 많이 힘드십니다. 어제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얼굴이나마 뵈려고요. 영주귀국하신지 15년이 넘네요. 재임기간 3년을 마치고 올해 초 귀국해서 경기도 지역 행사는 거의 다 좇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올해 에트노스학교가 국립남도국악원 재외동포 연수교육에서 '진도북춤'을 한달동안 수업을 받을 때 잠깐 만났습니다. 그렇게나마 사할린 동포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조금씩 동포들의 삶과 애환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오늘 공연을 사할린 청소년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올해에도 연수교육을 받게되어 진도에 오게되면....... 저도 오늘 서도소리는 처음 들어봅니다. 감동입니다. 이 공연에 대해서 소개할 때, 사할린 동포들이 소리극이란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쉽게 설명하면 서양의 오페라 같은 거라고 답을 했다. 어떤 주인공이 나오고 주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데 제대로 답을 못했다. 서도소리극 장르는 소리극으로써, 토속민요인 서도소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극이다. 오늘 작품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극적인 요소가 미약하다는 점이다. 각 과정마다 극 중 인물이 구현하려는 곡명과 사설의 내용 전달과 함께 등장인물들의 대화 형식이 이루어져야 한다. 주고 받는 대사(또는 노래)가 들어가야 한다. 특히 극의 주요 요소인 등장인물의 갈등구조 없이 대단원으로 막이 내려졌다. 즉 스토리텔링 작업이 잡히지 못해서 아쉬웠다. 일제강점기라는 모티브를 넣는다면 당시 최고 유행가 '수심가'도 강조할 수 있고, 당시 유성기 음반 출연과 방송을 통해 유행된 신민요나 유행가를 아코디언이나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한 두곡 곁들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은 트롯트와 댄스곡만 보여주었지만, 극적 전환일때는 의상도 바꿔입어야 한다. 2부에서 극의 흐름을 이끄는 주인공 역활을 하는 향두어른이 나와서 트롯트를 부르는 대목에서는, 장날 마누라 몰래 넥타이를 메고 양복을 걸치고 읍에 나가서 유행가를 불렀으면 극의 흐름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2부 첫막에서 향두어른이 1부에서 입었던 의상과 상투를 틀고 나와서 독창으로 트롯트를 불러서 적지않게 당황했다. 이 노래를 왜 부르는지 주고 받는 대사 또는 해설자의 명확한 설명이 있었으면 기대 이상의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변사가 나와서 설명을 해주어도 극의 흐름이 생생하게 살았을 것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누구나 보는 내내 욕심을 내게 마련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성공요인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이다. 일단 일반적인 다른 문화재 전승 구성원보다 인적 구성이 아주 젊은 국악인들이 주류를 이룬다. 10살 전후부터 시작한 많은 제자들이 이제 40대 전후가 되어간다. 특히 본부가 젊은 유동인구가 많은 강남에 있고 전국에 있는 각 지부에서 재능있는 인적 동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로지 작품의 컬리티를 위한 공연연습 외 업무는 단단한 기획사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 더 부치면 무형문화유산의 학술적 국면과 공연 작품은 이원화 해야한다. 관객을 위해서 만든 작품은 진화해햐 한다. 시대의 코드에 맞게,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는 MZ시대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생산자가 있으면 수용자가 있어야 지속적 계승이 이루어진다. 행사를 마치고 로비에서 권경석 회장과 유지숙 회장이 만나서 인사를 나누면서 앞으로 전국 순회공연에 전국 사할린 동포 어른들을 초청해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권경석 회장은 이번 행사에 전석 초대와 함께 파주와 양주에 이동할 수 있는 버스도 보내주셔서 추운 날씨에 편하게 올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최나타샤 사할린아리랑합창단장은 유지숙 회장과 박애리 명창에게 러시아 초코렛을 선물로 전했다. 지난해부터 사할린 동포 위문공연에 앞장 서고 있는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과 회원들도 사할린 동포들과 인사를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갔다. 이어 유지숙 회장과 전 회원들이 동포들을 위해 준비한 따끈한 떡과 귤 상자 선물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실어 보냈다.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은 동포들과 뜨거운 포옹을 하고 배웅을 했다. 오랜만에 양주와 파주에 사는 동포들이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아쉬움을 남기고 버스는 파주를 향해 떠났다. 조금 이른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누고,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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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효(孝) 배뱅이굿' 한마당 성료서울 용산구는 지난 16일 용산아트홀 대극장 미르에서 인간문화재 명창 박정욱의 '효(孝) 배뱅이굿 한마당'을 개최했다. 이번 기획공연은 용산아트홀 개관 13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다. 구민 누구나 무료 관람할 수 있는 공연으로 500여 명이 참석해 많은 호응 속에서 공연을 마쳤다. 공연 프로그램은 ▲꽃바람 ▲흥바람 ▲신바람으로 총 3부로, 희노애락이 담긴 소리와 춤, 노래와 악기연주 등 다양한 전통문화예술 공연이 펼쳐졌다. 특히, 명창 박정욱의 '효(孝)'를 주제로 한 배뱅이굿과 용산풍류를 보여주는 신민요, 성악곡, 국악 락밴드 등 다채로운 공연이 있어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었다. 첫 시작인 꽃바람에서는 노랫가락(소리), 박연폭포(소리), 연남교방무(춤), 도피안사(해금연주), 신뱃노래(성악곡), 연평도뱃사공(신민요), 배띄워라(신민요) 등이 있었다. 흥바람에서는 배뱅이굿(소리)을, 신바람에서는 달빛향해 타악듀오(국악 락밴드), 꿈꾸는 아리랑(국악 락밴드), 뱃노래 등이 이어졌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용산아트홀은 2010년 개관 이후 매년 기획공연을 개최하고 있다"며 "구민들이 더욱 다양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박정욱은 현재 용산공예관에서 한복 갤러리를 운영해 "한복짓는 명창 박정욱"이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지난해 3월 행정안전부 이북5도위원회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제5호 배뱅이굿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박정욱 명창 외에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배뱅이굿 예능보유자 김경배, 경기국악제 대통령상 수상자 최은호와 김점순, 서울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자 박경랑, 단국대학교 국악과 교수 강은일, 국가무형문화재 태평무, 서도소리 이수자 양진희, 이탈리아 베르디 국제콩쿨 테너 1위 수상자 강창련 등 많은 정상급 출연진들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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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장편소설 '흙의 소리' 출판기념회지난 11일 오후 2시 악성 박연의 삶과 꿈을 그린 장편소설 '흙의 소리'(도서출판 국악신문)출판기념회가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개최되었다. 신현득아동문학가 장윤우 엄한정 시인 이명재 평론가 외 많은 문인 작가들 음악인들 화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기념식은 김치홍 평론가의 진행으로 시작되어 오현승(서도명창)의 영동아리랑이 축가로 메아리쳤다. 이어서 축시를 선사한 김영숙 시인의 서시 '풍경' 이 낭송되었다. 기미양 (주)국악신문사 대표이사의 인사말, 한명희(전 국립국악원장) 이미시 서원 좌장과 정영철 영동군수의 축사가 있었다. 이에 대한 답사를 한 이동의 작가는 "박연이 충북 영동 출신이어서 군수를 비롯하여 재경 영동 인사들이 많이 참가하였고 아리랑도 영동아리랑 공연을 하게 되었다"라고 전했다.. 이어서 김운향 시인 소설가의 소설 낭송 '못다한 이야기' 조규수 시인의 '흙을 쌓아 산을 이루었네' 시낭송이 진행되었다. 특별 코너로 최경호 평론가의 '흙의 소리' 소설 평론으로 '박연의 삶과 꿈 형상'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영동이 고향인 이동희 작가는 "영동 답사에서는 박연이 쓴 시에 있듯이 '흙을 쌓아…'에서 주제를 파악하고자 하였고, 집필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유배 생활과 그 당시 남긴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낙기고자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3대악성 우륵, 왕산악, 박연 중에서 두 사람은 신화 전설적 인물인데 비해, 박연은 뚜렷한 족적을 남긴 예와 악의 실천자"라고 강조하였다. 소설 속 삽화를 그린 원로작가 이무성 회백은 "원색 삽화를 그리게 된 일화와 영동 시민들이 박연의 인물에 대해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한다고 전했다. 박윤규 시인의 시조창 '10년을 경영하여'이 메아리치고, 휘날레는 이혜솔 명창의 아리랑 공연으로 이날 출판기념회를 끝맺었다. '흙의 소리'는 도서출판 국악신문 기획으로 2년 2개월 동안 111회에 걸친 발표한 연재소설로 난계 박연의 말년 전남 고산 유배 등 새로운 사실을 밝혀 작품화 한 것이다. 다음은 영동군수 축사 전문이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산비탈을 화려한 색으로 물감칠하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나라의 3대 악성 중 한 분인 난계 박연 선생의 삶을 생생하게 연출한 장편소설 「흙의 소리」가 출간하게 되어 영동군민의 한 명으로서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먼저, 이번 「흙의 소리」 출간을 위해 노력하신 이동희 단국대 명예교수님과 기미양 (주)국악신문사 대표이사님 그리고 관계자분들께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동안 우리는 악성이라는 음악적 업적에 가려진, 난계 박연의 삶에 관해서는 별다른 논의도, 의문도 없었습니다. 난계 박연의 삶과 꿈을 연출한 「흙의 소리」 출간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감 주고, 박연 선생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난계 박연의 고장인 충북 영동에서 우리나라 최초 전통국악분야 국제행사인 ‘2025 영동 세계국악엑스포’유치가 확정되어 2025년 9월 12일부터 10월 11일까지 30일간 레인보우힐링관광지와 국악체험촌 일원에서 개최될 예정입니다. 30개국 97만명의 내·외국인 관광객이 방문하는 국제적인 문화행사에 예술가분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이동희 단국대 명예교수님과 (주)국악신문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이 자리에 함께해주신 여러분들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11월 11일 영동 군수 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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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계 주제 ‘흙의 소리’ 출판기념회 축하합니다.국악신문 연재를 시작하신지 3년여 만에 출판기념회를 갖게 되신 작가 이동희 선생님, 그리고 삽화를 맡으신 이무성 화백님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장편소설 ‘흙의 소리’ 연재는 2020년 9월 17일 시작하여 2022년 10월 20일까지 총111회로 마친 작품입니다. 국악신문 27년간의 종이신문에서 인터넷 매체로의 대 전환, 재창간 기념하여 기획한 코너로 모신 작품입니다. 2004년 소설 ‘노근리아리랑’으로 ‘제4회아리랑상’을 수상하셨던 인연으로 교류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작가 이동희 선생님의 품격과 작품 성향을 잘 아는 것은 물론, 단국대 문과대학장을 마치시고 고향 영동군에 농민문학관을 설립하고 운영하시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청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동군이 배출한 악성 난계 박연 선생의 삶을 주제로 한 작품을 연재한다면, 여기에 이무성 화백의 삽화를 함께 한다면 문학과 미술과 국악의 만남이라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기획을 수립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작가 화백 두 분 모두 쾌히 수락을 해 주셔서 연재가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작가 이동희 선생님은 앞에서 언급한 ‘아리랑상’ 심사 과정에서 일관된 우리 정서의 흙을 주제로 20여편의 작편 소설을 발표하신 저력을 보고, 심사위원 한 분이 ”와 노벨상 후보감이네"라고 하여 크게 동의한 바도 있었습니다. 삽화를 맡아 주신 이무성 회백님은 우리나라 6. 70년대 LP 국악음반 전성시대의 표지화를 장식해 주신 인연으로 국악계의 원로 이시기도 하고, 증언자이시기도 합니다. 이 조합은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지금 영동군은 ‘난계국악제’의 명성을 통해 ‘2025 영동세계국악엑스포’를 확정하고 준비 중이 있습니다. 난계 박연선생의 삶과 꿈을 담은 장편 소설 ‘흙의 소리’ 작품은 이 행사의 성공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난계 선생의 존재를 영동군이 널리 알리는 계기일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이 작품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동세계국악엑스포가 성공하기를 기원 합니다. 이동희 이무성 두분과 함께하신 모든 분들의 건강을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3. 11. 09. (주)국악신문사 대표이사 기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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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문학기념관’ 농민문학포럼, 난계 재조명지난 11일 오후 2시 충북 영동군 ‘농민문학기념관’(관장 이동희) 주최, 영동군 한국문학관협회 후원으로 ‘난계 박연 재조명’을 주제로 ‘농민문학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포럼은 문학평론가 최경호의 이동희 장편소설 흙의소리를 내용으로 하는 ‘박연의 삶과 꿈’에 대해 발표했다. 이어 제2 주제 발표로 '난계 박연의 위상과 영상'을 서화가 안병찬이 ‘박연의 영정에 대한 고증’을 발표하였다. 자유 토론에서는 영동국악축제위원회의 사무국장 소설가 이명건 외의 토론이 진행되었다. 2시간 동안 지역 향토사학회 고적회 회원들과 주민자치회 전국 농민문학작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작품 발표도 있었다. 작품 발표는 김영숙 서시 ‘수다쟁이’, 우명환 시조 ‘귀뚜라미’, 윤주헌 시 ‘엿질금’, 민영이 소설 ‘어머니의 땅’, 이성남 시 ‘한민족 대서사시’, 손순자 시‘달과 우물’ 박화배 가곡 ‘아 목동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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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소설집 ‘박연의 삶과 꿈 흙의 소리’[내 책을 말한다=이동희] 시골 옛집으로 내려온 지 꽤 오래 되었다. 나가던 데서 정년을 하고 늘 노래를 하던 고향으로 온 것이다. 한국전쟁 통에 고향 마을을 떠났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형편이 안 되니 1년만 쉬라고 하여 아버지가 운영하던 방앗간에서 멀건히 놀고 있다가 피란을 갔고 낙동강이 끊어져 되돌아 왔다가 다시 나가 동서남북을 떠돌며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때 6. 25 한국전쟁으로 불탄 터에 향과 앉음새를 비슷하게 하여 흙집을 짓고 거창하게 옥호를 귀경재歸耕齋라 하였는데 논밭은 한 뙈기도 없다. 옛날에 다 팔아 남의 것이 된 지 오래고 푸성귀를 심은 텃밭이 조금 있을 뿐이다. 글밭을 간다는 문경文耕을 생각한 것이지만 생각 뿐 말 뿐 잘 안 되고 있다. 흙집이라고 하였는데 짚을 섞어 찍은 흙벽돌로 벽을 쌓은 것이다. 도배도 하지 않고 방바닥도 장판 대신 돗자리를 깔았다. 흙이 숨을 쉬게 하고 흙내를 맡기 위해서이다. 농촌 마을은 온천지가 다 흙이지만 흙냄새를 차단하는 구조에 대하여 거부하는 것이다. 오랜 동안 콘크리트 숲 속에 살며 찌든 때문이다. 흔히 하는 얘기로 마늘을 한 접 사서 다용도실에 걸어놨는데 얼마 안 가서 다 썩었더라는 것이다. 시멘트의 독성을 다 마시며 살고 있는 단적인 예이지만 어디 마늘뿐이고 사람뿐이겠는가. 그동안 흙에 대한 얘기를 많이 썼다. 땅에 대한 얘기도 쓰고 농촌 농민 시골 얘기를 많이 썼다. 땅과 흙이니 흙바람 속으로이니 서러운 땅 서러운 혼이니…… 농촌에서 나고 자랐다고 해서 다 흙타령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쩌다보니 그런 얘기를 많이 쓰게 되었고 이제 마감을 해야 되는 시기에 생각해 보면 왜 그런가, 그게 뭔가 싶다. 은사인 무영無影선생이 1946년에 소설집 '흙의 노예'를 내고 3년 후 민중서관에서 '산가山家', '향가鄕歌'를 출간하면서 무영농민문학선집 1권 2권이라고 붙였다. 그때 이만하면 농민소설가가 된 것이 아니냐며 농민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대단히 흐뭇하게 토로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농촌 농민에 대하여 얘기를 하고 글을 쓰고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무척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 선생을 찾아가 배우고 썼지만 나에게 그런 보람이 있는 것일까. 일찍도 생각해 본다. 그동안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쓴 것 같다. 거기에다 무슨 얘기를 한 것일까. 땅은 소유의 욕망이고 흙은 땀의 의지라는 둥 개념만 늘어놓은 것 같다. 보릿고개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나듯이 아리랑 가락을 들으면 웬지 눈물이 나고 그리워지듯이 진정한 의미의 흙은 눈물의 테마이고 아픔과 그리움의 테마이다. 흙의 소리는 어린 시절 보리피리 곡조처럼 흙으로 빚은 오카리나 소리처럼 아련한 그리움이다. 악성 난계蘭溪 박연朴堧 선생의 고을에 살며 도리천 선법당에나 있다는 세계에서 제일 큰 천고天鼓의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 선비의 삶과 일과 꿈, 영동 아리랑고개 기억의 저편 흔적들을 톺아보며 역사에 되묻고자 한다. 그 때 왜 그랬는가. 시골 농촌 마을 사람들 얘기로 쓰려는 것이다. 내레이터는 전지적 3인칭 시점, 필자를 닮은 기자, 무명 시인이다.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고 청탁한 (주)국악신문사에 감사드리며, 마지막 열정을 쏟아 보답하려 한다. 전국의 독자 여러분, 세계 여러 네티즌들의 질정을 바란다. 이동희의 연재소설 '흙의 소리' http://http://www.kukak21.com/bbs/board.php?bo_table=news&me_id=90&me_code=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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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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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창립 초대회장에 이종선씨 취임한국서예술협회(회장 이종선)가 지난 3월 31일 창랍총회를 거쳐 7월10일 서울시로부터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아 활동에 들어간다. 7월 28일 법원 등기를 마친 한국서예술협회는 우리 전통문화얘술인 서예의 진흥발전을 위해 첫째,서예창작활동을 위한 전시사업 둘째, 서예인 양성을 위한 공모전 사업, 셋째,서예교육을 위한 학술사업, 넷째. 서예저변확대를 위한 대중화 사업 등을 추진한다. 임원과 회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회장-이종선, 부회장-이은설, 상임이사-임종현, 학술이사-김재봉, 이사-정혜영, 김현선, 이정철 감사-강승일, 선점숙 사무국장-김문희 회원- 강미정 강승일 강정이 고옥희 고유석 권선종 김경연 김문희 김상화 김석권 김순임 김순환 김윤숙 김율의 김은석 김은정 김재봉 김재용 김진용 김차연 나웅인 박광양 박연하 박영섭 박정완 박종식 박중근 박지애 박희철 배영희 백진빈 변관섭 서정선 선점숙 손창수 송순행 신석균 신선경 신영상 안미자 안태옥 오현옥 유영민 유창숙 윤문중 이강준 이세영 이순규 이순이 이양숙 이영선 이영자 이옥재 이은설 이은주 이재찬 이종선 이종세 이태길 이현배 이현주 이혜수 이화숙 임종현 장인오 장주희 전애선 정구삼 정미숙 정상진 정안심 정혜영 조미향 조순제 지달승 진용찬 진준호 채수철 채호순 최낙순 최세섭 최영무 최영애 최창은 하태모 한경희 한명희 한재근 한지연 한현자 허선례 허원선 허희정 현해용 황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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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무형문화재 제64호 '진도아리랑' 보유단체 진도아리랑보존회'지정'진도아리랑보존회' (대표 박병훈)를 지난 7일 전라남도가 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64호 진도아리랑 보유단체로 지정하였다 아리랑은 2012년 12월 5일 유네스코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15년 9월 22일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진도아리랑은 호남 지역를 대표하는 진도아리랑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전라남도는 "진도아리랑은 한국의 민요 남도민요의 정수로 전통성과 예술성이 높게 평가되어 보존, 전승 할 필요성이 있어 이를 지정(인정)한다"고 밝혔다. 현재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군 남동4길11에 자리잡고 있는 진도아리랑보존회는 지금부터 38년 전인 1985년 진도아리랑보존회 조직, 전국에서는 가장 먼저 만들어진 아리랑보존 단체이다. 전 진도문화원장 박병훈 회장은 1986년부터 진도아리랑 가사 780여 수를 수집하고 4회에 걸쳐 '진도아리랑 가사집'을 발간했다. 특히 진도아리랑노래비 건립에 앞장섰다. 진도아리랑 문화재 지정상황은 다음과 같다. 연도 종별 지정 2001년 진도군 무형향토사료 '진도아리랑' 제1호 지정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아리랑' 전승단체 사인 진도아리랑보존회 (대표 ; 박병훈) 등재 2015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 '아리랑' 제129호 지정 2022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64호 '진도아리랑' 제64호 지정 2023년 전라남도 진도아리랑보존회 단체지정 사단법인 진도아리랑보존회(대표 : 박병훈) 지정 매년 정기 발표회와 정선,밀양,서울 아리랑제에 참가해 오고 있다. 그동안 400여 회의 전승활동으로 진도아리랑을 대내외에 선양하여 왔다. 진도아리랑보존회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연도 수상종목 수상처 비고 1985년 군민노래자랑 최우수상 진도군수 1986년 아리랑 감사패 유네스코 전남지회장 1989년 아리랑 감사패 동아일보사 1990년 전남향토문화상 문화원연합회 박병훈 회장 1992년 아리랑 기념패 예술마당 솔(대구) 1992년 진도차첨지놀이 발굴 우수상 전라남도 1995년 아리랑 감사패 한민족아리랑연합회 1996년 아리랑 공로패 진도군수 박병훈 회장 1997년 진도군민의 상 진도군 박병훈 회장 1999년 아리랑 공로패 재일본한국문화센터장 2012년 아리랑 공로패 전라남도 지사 박병훈 회장 2012년 신지식인 대상 시사투데이 박병훈 회장 2018년 아리랑 공로패 국회의원 윤영일 2019년 제1회 아리랑코리아 대상 대회장 (국회의원 설훈 ) 박병훈 회장 2022년 전라남도문화상 전라남도지사 박병훈 회장 보존회 구성원은 회장 박병훈과 박숙영,김춘심,이재심,이정자,문광조,장일,박영상,최원심,이문교,박숙예,이성교,박소심,박정례,박영예,안정자, 한영란,이만심,박주형,박병록,최왕복,박양예,강인순,곽서희,김수자,박연자,조진옥,이해숙,허지웅,곽옥례,주종심,차영숙,최은희,손정숙,조소연,박숙경,허애선,허유정,신미숙,박영숙,곽춘자, 함금선, 총 41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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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대 춤꾼이 만든 '2023 춤&판 고무신춤축제'서울남산국악당과의 공동주최, 한국춤협회가 주최, 주관하는 ‘2023 춤&판 고무신춤축제’가 14일부터 23일까지 서울아트센터 도암홀과 서울남산국악당에서 개최된다.‘춤&판 고무신춤축제’는 명무들의 전통춤 레파토리를 독무로 볼 수 있는 ‘춤&판(춤앤판)’과 수도권 대학의 한국무용 단체들이 전통춤부터 한국창작춤까지 다양한 작품을 펼치는 ‘고무신춤축제’로 이루어진 (사)한국춤협회의 대표 공연축제이다. 2011년부터 시작된 ‘춤&판 고무신춤축제’는 차세대부터 중견 무용가, 원로 무용가까지 전 세대 춤꾼들의 다양한 춤사위를 볼 수 있는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무신춤축제’는 수도권의 14개의 대학이 참가한다. 공연은 9월 14일부터 15일까지 양일간 서울아트센터 도암홀에서 오후 7시에 시작된다. 14일에는 고무신 프로젝트팀 컴바인의 '합쳐진 하나의 그리드' 공연이 펼쳐진다. 타인과 마음을 나누는 모습을 그리는 이야기를 담은 창작작품으로 참가 무용수 14명이 공동으로 안무했다. 이어 국민대 '신태평무-비손', 단국대 '울림의 色', 동덕여대 '2023_오래된 R', 상명대 '강선영류 태평무', 한예종 무용원 실기과 '고요한 순환 中 진여에서' 한국체대 '오늘의 의식', 한양대(ERICA) ‘박제(剝製)’ 공연된다.15일에는 고무신 프로젝트팀 컴바인의 '합쳐진 하나의 그리드'가 한 번 더 무대에 오른다. 이어 경희대 '燔我웃', 서경대 '종이달', 성신여대 '23'soul', 숙명여대 '한영숙제 정재만류 승무', 한예종 전통예술원 '춘앵전', 한성대 '향운 香雲', 한양대(서울) ‘숨 쉬는 봄 ver.3'가 공연된다.한국춤협회는 '춤&판 고무신춤축제'가 마무리된 후 춤&판에 참여했던 전통춤꾼 무용가들과 고무신춤축제에 했던 대학생 무용수들이 함께 하는 좌담회를 연다. '춤&판(춤앤판)'은 20~23일 서울남산국악당에서 공연된다. 20일에는 ▲김유나 '교방굿거리춤' ▲김현태 '선살풀이춤' ▲박은진 '이동안류 진쇠춤' ▲박정한 '정은혜류 대바라춤' ▲손미정 '여울(최현류 산조춤)' ▲유혜진 '강선영류 즉흥무' ▲황규선 '강선영류 태평무'가 선보인다. 21일에는 ▲강연진 '경기검무' ▲김진희 '박병천류 진도북춤' ▲김혜영 '한영숙류 살풀이춤' ▲박연주 '조갑녀류 민살풀이춤' ▲양서윤 '한영숙류 태평무' ▲이미희 '정재만류 허튼춤' ▲장인숙 '김경란작 승무'가 공연된다.22일에는 ▲김선영 '강선영류 태평무' ▲김일환 '신관철류 수건춤' ▲김지영 '춤본Ⅱ' ▲박시종 '진주 교방굿거리춤' ▲임성옥 '살풀이춤_홀연' ▲정관영 '평채 소고춤' ▲정유진 '겹채 장고춤'이 공연된다. 축제의 마지막날인 23일 한국춤협회 초대이사장인 김매자, 명예이사장인 임학선·윤덕경·백현순·이미영, 현 이사장인 윤수미의 무대가 한 자리에서 펼쳐진다. 본 축제의 총예술감독인 한국춤협회 윤수미 이사장은 "한국춤은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있어 우리가 지키고 전승하며 동시에 발전시켜야 할 고유한 문화적 자산이다.”라고 전하며, "이번 2023 춤&판 고무신춤축제를 통해 한국춤의 전통을 잇고, 새로운 한국춤 콘텐츠를 개발하여 한국춤의 전통과 미래를 함께 아우르는 춤축제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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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그리고 그 너머… 제8회 여성연극축제 30일 개막제8회 여성연극축제가 8월 30일 대학로 민송아트홀에서 개막식을 시작으로 9월 24일까지 기획전, 연출가전, 작가전, 세대공감전 등 총 5팀의 공연과 전시를 선보인다. 2013년부터 한국여성연극협회가 주최해온 여성연극제는 올해로 8회를 맞이했고, 더욱이 올해 한국여성연극협회는 창단 30주년을 맞이해 그 어느 해보다 탄탄한 공연과 전시를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제8회 여성연극축제는 여성의 이야기와 함께, 인간 삶에서 죽음까지 광범위한 지평을 펼쳐나간다. 특히 작가전과 연출가전은 공모를 통해 참여자를 선정했는데, 신진 연극인들에게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펼치는 데 목적이 있다. 기획전 ‘삼ㅇ삶(緣)’은 박다시 작가와 이정하 연출의 작품으로, 인간 삶에서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인지를 묻고 있다. 다소간 무거운 주제이나 여기에 해학이 입혀져 지루하지 않게 감상할 수 있다. 장례지도사 성호와 서희는 각자 고객 유치를 위해 대립하고, 여기 인플루언서 지희가 들어와 벌어지는 일들을 담아내고 있다. 연출가전 ‘우리는 논개의 얼굴을 모른다’는 김지식 작가와 왕정민 연출의 작품으로, 역사 속 인물이 아닌 한 여성으로서의 논개를 불러낸다. 3명의 서로 다른 논개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작가전 ‘노파의 오찬’은 강추자 작가와 박연주 연출의 작품으로, 가슴 속 품은 이야기가 많기도 한 한 노인의 이야기이다. 관객들은 전쟁의 상처와 그리움의 조각들, 감방과도 같은 4면이 시멘트벽으로 둘러쳐진 방에서 노란 카나리아를 키우는 노파의 외로움과 조우할 것이다. 또한 2015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발 ‘벚꽃동산 - 진실너머’ ASIN AWARDS 작품상을 수상한 박연주 연출과의 첫 만남은 작가에게도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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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61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前 한국동양예술학회 회장) 브라질에서는 2019년 8월 아마존 열대우림 전역에 4만 건 넘는 화재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비영리 환경단체 ‘아미 헬프 더 플래닛’이 설립되었다. 17세부터 48세까지 환경 엔지니어, 건축가, 심리학자, 언론인, 디자이너 등 54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아마존 지역에 나무 심기, 화재가 빈발한 지역에 소방관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운동 등을 벌이며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시사인 참조) 브라질 언론에서도 이러한 활동에 대해 매우 신기하게 취급했다고 하는데, 이 단체 대표인 마리아나 파시롤리 씨는 이러한 BTS 아미의 활동을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은 열정들이 모인 결과”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BTS는 정신 건강과 자기 긍정에 대해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인종주의와 차별, 기후변화에 맞서자고 목소리를 높인다.”라고 말한다. 또한, "2021년 9월 유엔 총회에서는 청년이 ‘잃어버린 세대’가 아니라 ‘환영의 세대’라고 말하며, 이러한 메시지가 브라질 아미들을 정치 · 사회 · 환경적 영역에 참여해 현실을 바꾸려는 강력한 행위자로 변모시키고 있다.”라고 파시롤리 대표는 주장한다. 브라질, 필리핀, 홍콩, 미얀마,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BTS의 음악은 그 노래의 메시지를 활용하여 투쟁가로 불리고 있다. 이지영 한국외국어대 연구교수는 "아미는 대안적 현실을 상상하고 실행한다”라고 말하며 BTS와 아미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다. ‘월간중앙’의 이화랑 기자는 본인을 ‘찐아미’라고 소개한다. 월간 중앙에 보도되었던 이기자의 ‘찐아미’들에 대한 인터뷰 기사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5년 차 아미 고은비(26)씨는 "회사가 정해주는 의미 없는 사랑 노래가 아니라, 직접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래한다는 점이 특별하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4년 차 아미 주현경(26·가명)씨도 "음악에 대한 진실함”을 꼽으며 "BTS의 ‘LOVE YOURSELF’ 앨범 시리즈를 통해 나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BTS의 음악이 가진 힘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있다. 대표적으로 ‘화양연화(花樣年華)’ 앨범 시리즈에선 불확실한 미래로 위태로운 청춘, 그리고 그러한 불안마저 끌어안고 질주하는 젊음을 노래했다. 또한 ‘LOVE YOURSELF’ 앨범 시리즈에선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고, 사랑으로부터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었다. 4년 차 아미 강시현(27·가명)씨는 "취업준비생 시절 처음 만난 그들의 노래는 그 당시 나에게 절실했던 공감과 위로의 한마디와도 같았다”고 회상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아미들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노래’를 묻는 질문에 ‘Whallien52’, ‘EPILOGUE: Young Forever’, ‘So Far Away’, ‘Lost’, ‘Outro: Wings’, ‘Magic shop’, ‘Answer: Love myself’, ‘Life Goes On’ 등 각각 다른 그들의 답을 내놓았다. 그것은 그만큼 BTS의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고은비씨는 "BTS의 개인 곡들을 좋아 한다”며 "나 자신을 사랑하고 싶을 땐 진의 솔로곡 ‘Epiphany’를 듣는다”고 말했다 진의 솔로곡 ‘Epiphany’는 "Love yourself의 기승전결 중 결(結)에 해당한다. 그 기승전결은 기(起) : ‘Euphoria’ - 극도의 행복감, 승(承) : ‘Serendipity’ - 사랑의 설렘과 두근거림, 전(轉) : ‘Tear’ - 눈물, 파괴, 결(結) : ‘Epiphany’ - 깨달음 등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앨범의 주제를 각각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 셋!(그래도 좋은 날이 더 많기를)’은 ‘윙즈(WINGS)’에 미처 담지 못했던 청춘과 성장의 이야기를 완성한 메시지로서 ‘YNWA(YOU NEVER WALK ALONE)’의 수록곡이다. 데뷔 초에 ’BTS가 처음으로 아미에게 바치는 노래였는데, 그 당시의 설움과 고난을 이겨내고 진정한 팬이 되어 준 아미에게 감사함을 표현한 곡이다. 이 노래는 아미들의 ‘눈물 버튼’으로도 통한다. YNWA는 함께 걷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너 넨 아이돌이니까 안 들어도 구리겠네/ 너네 가사 맘에 안 들어 안 봐도 비디오네/ ....(중략)...../ 그래도 좋은 날이 앞으로 많기를”. BTS는 그 시절 아픔을 함께한 아미들에게 노래로 위로를 건넸다. 박연주씨는 "BTS는 하나부터 열까지, 본인들의 기쁘고 슬픈 감정들, 자신들의 약한 모습까지도 우리에게 모두 보여줬다”고 고마움을 나타냈다. 캐나다 아미 로날렌(Ronalene,17)은 "BTS와 아미는 작은 회사에서 시작해 함께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함께 성공했다”고 추억했다. 주부 아미 박선영(36)씨는 "아미들끼리 모여서 여러 가지 자원봉사를 많이 한다”며 "얼마 전 여의도 한강부지 콘서트에서도 공연이 다 끝난 뒤 쓰레기를 깔끔하게 처리한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때 아미라는 공동체의 힘을 느낀다”고 말했다. 8년 차 아미 박윤아(25·가명)씨는 "BTS의 행보는 그들이 음악으로 항상 전달하던 평화, 성장, 억압에 대한 대항, ‘방탄’으로서의 포부와 일치한다”며 지지를 표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BTS의 얼굴이라는 생각으로 행동에 더욱 책임감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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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목포전국국악경연대회 수상자 명단판소리 명창부 대상 (대통령상) 이선희 최우수상 (전라남도지사상) 윤세린 우수상 (목포시장상) 김숙희 장려상 (대회장상) 박연희 판소리 일반부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전남숙 최우수상 (목포시장상) 이지원 우수상 (한국국악협회전라남도지회장상) 유수현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민상 판소리 신인부 대상 (전라남도지사상) 박심업 최우수상 (목포시의회의장상) 장영화 우수상 (한국국악협회전라남도지회장상) 정시영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순천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영순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이석성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조진옥 판소리 학생부 대상 (전라남도교육감상) 배수진 최우수상 (전라남도목포교육지원청교육장상) 나연우 우수상 (한국예총 목포신안지회장상) 김예은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공준웅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아진 무용 명무부 대상 (국무총리상) 장보름이 최우수상 (목포시장상) 이가원 우수상 (한국에총전라남도연합회장상) 신연희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홍지선 무용 일반부 대상 (전라남도지사상) 김건우 최우수상 (목포시장상) 임희주 우수상 (목포시의회의장상) 김현송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조희숙 무용 학생부 대상 (전라남도교육감상) 이경서 최우수상 (전라남도목포교육지원청교육장상) 황이수 우수상 (한국예총 목포신안지회장상) 김서현(10년생)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허정윤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인하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서현(06년생) 기악 일반부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최승아 최우수상 (한국국악협회이사장상) 성유미 우수상 (한국예총전라남도연합회장상) 이혜전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박준범 기악 학생부 대상 (전라남도교육감상) 송가원 최우수상 (전라남도목포교육지원청교육장상) 노윤지 우수상 (한국예총 목포신안지회장상) 이창준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연정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이진희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송희찬 고법 명고부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김태현 최우수상 (목포시장상) 문제복 우수상 (목포시의회의장상) X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X 고법 일반부 대상 (전라남도지사상) 최유정 최우수상 (목포시장상) 박수현 우수상 (목포시의회의장상) 박재우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정해찬 고법 신인부 대상 (목포시장상) 강진영 최우수상 (목포시의회의장상) 이복규 우수상 (한국예총 목포신안지회장상) 박심업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정시영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남삼례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순옥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배광수 학생부 종합 대상 (교육부장관상) 송가원 국악공로상 (국회의원) 장보영 국악지도자상 (목포시장) 이영주 (목포시의회의장) 장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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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국의 지역춤, 대구·경북지역의 춤지리와 기후환경에 따른 대구·경북인의 기질 대구·경북지역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심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자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신조어를 쓸 정도로 무더운 날이 많다. 그리하여 대구·경북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중시하며 이러한 생태환경적 배경으로 대구·경북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여 발전시켜왔다. 신라 천년의 문화적 배경과 춤전승 대구·경북지역은 역사적으로 서라벌(경주)을 도읍지로 시작해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1천 년 동안 행정, 산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행정의 중심이 송도(개성)와 한양(서울)로 옮겨진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영남호족의 세력이 여전히 핵심을 유지하면서 오늘날까지 ‘선비(양반)정신’이 깃들어 있는 독특한 지역춤의 특성을 전승하여왔다. 신라시대 악성(樂聖) 우륵이 가야금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는 가야지무(伽倻之舞), 한기무(韓岐舞), 미지무(美知舞), 대금무(?琴舞)가 있었고, 계고(階古)에게는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는 노래를, 만덕(萬德)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전한다. 뿐만 아니라 황창무(黃昌舞)와 처용무(處容舞), 상염무(霜髥舞), 무애무(無?舞), 오기(五伎) 등 남성춤도 많았다. 그밖에도 도솔가무(兜率歌舞), 회소곡(會蘇曲), 그리고 팔관회와 연등회에서 가무백희(歌舞百戱) 등 민간생활과 밀접한 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경상감영의 관기와 권번춤 전승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와 상주로 이어져 온 경상감영이 1601년(선조34년)에 대구로 이전하게 되면서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국가와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지금의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 일대)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년,영조 43년),『대구읍지大丘邑誌』(1768년 발간), 『경상도 읍지』(1832년경), 『영남읍지』(1871년경,1895년),『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1888) 등> 그러나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이 사회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모임이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등 4명이 대구기생조합이나 서울로 진출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 중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 김천조합 소속이 3명이나 기록되어 있고,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을 잘 추었다고 하였다.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927년 ‘달성권번’이 새로 설립되었다. 무형문화재 종목의 연희와 춤들 대구·경북지역이 고대부터 근대까지 영남지역의 중심지였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침탈의 거점인 부산·경남지역이 중심도시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유교와 양반문화를 비롯한 예술문화는 여전히 대구·경북지역에 뿌리 깊게 남아있었다.농악영남지역 농악이 다른 지역 농악과 가장 큰 차이는 시각적으로 엄청나게 큰 고깔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영남북부권이 남부권보다 더 큰 고깔을 쓰는 경향을 보이며, 판굿도 발달하여 7종목(고산, 욱수, 청도차산, 금릉, 비산(날뫼), 구미무을, 경산보인)이나 지정되어 있다. 그 특징은 원박적이고 아주 빠른 리듬과 웅장한 북춤과 화려한 고깔춤이 발달했으며, 천왕매기굿(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굿)이나 지신밟기에서 잡귀잡신을 쫓는 힘찬 덧배기가락과 덧배기춤이 발달했으며, 개인놀이보다 집단놀이와 뒤풀이춤이 발달했다. 고산농악(대구 1호)은 농기구를 앞세우고 태극무늬로 도는 덩덕궁이, 원을 돌며 각자 춤추는 춤굿, 손잡고 원을 돌면서 닭을 쫓는 닭쫓기, 나선형(螺旋形)으로 들어갔다 풀어 나오는 방석말이 등이 특징이다. 욱수농악(대구 3호)은 동제당 앞에서 신내림을 받는 천왕받이굿과 원형으로 춤을 추는 둥글데미, 세로 2줄로 마주보고 앉은 연주자들을 상쇠가 Z형으로 빠르게 돌면서 징·북·장구·법고 열로 끊어 일으켜 풀어나가는 외따기와 흥겨운 어깨춤을 추는 덧배기춤 등이 특징이다. 청도차산농악(경북 4호)은 천왕기(天王旗)싸움에서 발달한 농악으로 꿋꿋하고 향토적인 옛스러움과 질박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장단을 외가락으로 빨리 몰아가는 경우가 많아 소박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금릉빗내농악(경북 8호)은 마을의 성황제와 풍년을 기원하는 별신제(別神祭)가 섞여진 동제(洞祭)의 형태로 진풀이 농악과 무당굿과 줄다리기 등이 혼합되어 가락이 매우 강렬하고 종류도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날뫼북춤(대구 2호)은 대구비산농악에서 북을 연주악기로 추는 북춤만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특유의 덧배기가락(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덩덕궁이, 자반득이(반직굿), 엎어빼기, 다드래기, 허허굿, 모듬굿, 살풀이굿, 덧배기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미무을농악(경북 40호)은 쇠와 소고는 전원이 전립에 상모를 쓰고 이외에 배역들은 모두 백색의 큰 고깔을 쓰는데, 고깔의 꽃송이들은 춤사위에 따라 움직이게 한다. 길굿가락과 정적궁가락, 덧배기가락 등 경상도 특유의 쇠가락이 발달하였다. 경산보인농악(경북 41호)은 전형적인 모의농사굿 형식이면서도 다른 지역과 달리 글자놀이가 발달하였고, 섬세한 덩덕궁 가락과 삼채가락이 조화를 이루고, 특유의 별다드래기장단과 덧뵈기장단이 가락의 주를 이루어 화려하고 웅장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탈춤탈춤은 부산·경남지역 낙동강 하류에 7종목(야류·오광대)이나 국가 또는 지방무형문화재가 지정되었고 연희적인 면이 발달했으나, 대구·경북지역은 별신굿놀이 성격으로 재담이 적고 연희보다 의식성이 많은 하회별신굿탈놀음(국가 69호)과 예천청단놀음(경북 42호) 2종의 탈춤이 전승되고 있을 뿐이다. 별신굿이란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하며, 더불어 수호신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춤을 추었다. 하회별신굿탈놀음의 탈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10종11개)로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탈놀음의 반주는 꽹과리 중심의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지는데 우리나라 탈춤의 기원과 전승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천청단놀음은 대구·경북지역의 향토성을 보이면서 벽사진경을 추구하는 주술성과 상류층에 대한 풍자를 투박한 춤과 몸짓, 토속적인 가락에 실어서 전달하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키로 만든 큰 탈이 쓰인다는 점, 신령스런 동물이 부정을 물리치는 듯이 하는 동작과 춤에 커다란 부채모양의 주지판이 사용된다는 점 등의 특징을 지닌다. 소리춤안동놋다리밟기(경북 7호)는 안동지방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여성들만의 민속놀이로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주를 데리고 안동으로 피난을 와 개울을 건널 때 마을의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다리를 놓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놋다리밟기는 맨 앞에 노년부터 젊은 부녀자 순으로 수십 명의 여자들이 모두 허리를 굽혀 앞사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는 앞사람의 궁둥이 왼편에 대는데 마치 생선을 꿰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시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공주가 등(다리 역할) 위를 밟고 지나가면 밑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행렬 맨 앞에 구부려 다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안동놋다리밟기는 모든 여성이 한데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규모가 큰 향토오락으로 승부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소리춤으로 호남의 진도 해남 등지에 강강술래가 있다면, 영덕지역에는 월월이청청(비지정)이 있다. 노래와 춤놀이에는 달람세, 절구세, 둥둥데미, 실감기 등의 소리춤이 전한다. 근대 춤 전승 인맥 1950년 6.25한국전쟁으로 부산·대구지역만 남게 된 정부는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현재 대구 CGV한일극장으로 재건축)을 지정하여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의 공연이 집중되는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정소산 → 백년욱(대구 18호)정소산(호 小山, 본명 鄭柳色, 1904~1978)은 1900년대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춤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교방춤의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정소산은 대구출생으로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하규일(1867-1937)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고,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조선미인보감』(1918)에 보면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을 묘사했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와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가르쳤다. 제자 백연욱은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타계할 때까지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 정소산류 수건춤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이 춤은 궁중춤과 민속춤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의 수건춤으로, 처음 등장하여 먼저 절을 올리고 춤을 추는 궁중춤의 예법과 춤사위가 장중하고 단아하며 절제미가 있는 점이며, 춤이 전개됨이 따라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흥을 돋우는 민속춤의 요소도 함께 담고 있다. 박지홍 → 권명화(대동권번, 대구 9호), 최희선(달성권번)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姜太弘,1893-1957)이 부산 등지로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958)이었다. 박귀희(朴貴姬), 박초향(朴初香),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등이 판소리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이때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에서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다. 1940년 전후로 설립된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1929~2010)은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웠고,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웠다. 한영숙에게 전통춤을 사사받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다시 배워 달구벌 입춤 명무로 유명하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1995년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권명화 살풀이춤의 특징은 수건으로 고(苦)매듭을 엮었다 푸는 살을 푸는 과정이 유일하게 담겨있고 영남교방춤과 덧배기 춤가락이 깃들여 있는 점이다. 그밖에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였다. 김상규 → 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박성실 등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인물은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다. 김상규는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로 판검사가 되겠다는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가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다. 이처럼 해마다 작품 발표회를 하다 보니 논밭을 팔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면서도 춤에 대한 열정은 더욱 높아졌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 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가로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정막(정순영)과 김기전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문교부 인가)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당시 대구)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50년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 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대구·경북지역의 춤 미래 대구·경북지역이 오랜 역사의 부침(浮沈)속에서도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 북부춤의 중심적 특징과 더불어 향토춤의 특징을 온전히 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유난히도 춤 신명이 많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지역의 심성에서 비롯하였다고 본다. 20세기 초기에는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고, 뒤를 이어 20세기 후반에는 최희선, 권명화(대구 9호), 백년욱(대구 18호) 등이 그 명맥을 이어받았다. 현대춤과 발레 역시 끝까지 지역을 지켜 온 김상규(안동대 교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지역출신 무용교수가 많은 것도 근원적으로 춤의 고장이기 때문이지만 김상규가 대학교수로 무용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대학 무용학과를 개설하고 춤세계를 개척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울로 진출한 이숙재(한양대 명예교수), 김복희(한양대 명예교수), 박인숙(한성대 교수), 백현순(한체대 교수) 등이 ‘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지역에서도 구본숙(영남대 명예교수), 박연진(대구 가톨릭대 명예교수), 임혜자(계명대 명예교수), 김현옥(계명대 교수), 장유경(계명대 교수), 김희숙(무용가), 박현옥(대구가톨릭대 교수), 김소라(대구가톨릭대 교수), 이화석(대구예술대 교수), 강정선(대구무용협회장), 김죽엽(한국무용가), 최두혁(계명대 교수), 오레지나(대구가톨릭대 교수), 채명(무용평론가), 김용철(섶무용단), 손윤숙(발레) 등과 수많은 무용가들이 대를 이어 대구·경북춤의 정신을 고양하면서 세계를 향해 매진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춤의 인프라는 2015년 이래 매년 세계안무페스티벌(DICFe, Daegu International Choreography Festival)을 펼치며 세계적인 안무도시로 발전하는 초석을 다져 나가고 있다. 이병옥/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 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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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왕십리아리랑제, 제주아리랑부터 사할린아리랑까지지난 3일 왕십리아리랑보존회가 주최주관하는 제13회 왕십리아리랑제가 성동구 소월아트홀에서 '디아스포라 아리랑'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6월 보훈의 날을 맞이하여 보훈 가족 50여 명과 성동구민 등 300여 명이 객석을 채워 성황리에 성료되었다. 45명이 무대에 오른 이번 공연은 1부 이산의 노래, 2부 해원의 노래, 3부 상생의 노래로 구성되어 7개 지역 아리랑과 경기민요, 전통춤으로 구성되었다. 특별출연으로 김명남 명창이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를 선사했다. '왕십리아리랑'은 순수 창작곡이다.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장 이혜솔 명창이 작사하고, 양금 연주자 윤은화가 작곡했다.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 아리랑고개를 서로 함께 넘어요. 서울의 왕십리 우리 사는 곳. 개나리 화창한 꽃동산이래요.사랑과 희망이 넘쳐 흐르는, 서울의 서울은 우리 왕십리래요. 우리 서로 벅찬 가슴 마주하면서. 손잡아요 어깨동무 함께할래요. 한양도성 동쪽 십리 응봉산 정기. 세세년년 우리 삶터 희망의 샘터. 살곶이벌 응봉기슭 응방의 옛터. 역사문화 오래오랜 우리의 터전. 인류유산 아리랑은 우리의 자랑. 슬기로운 매사냥도 인류유산이래요." 첫 막은 '왕십리아리랑으로 열었다. 1부에서 '이산의 노래' 사할린아리랑은 소극으로 엮어내어 대일항쟁기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가면서 가족들과 생이별을 당하는 고난과 슬픔을 아리랑에 담아낸 이산의 아픔을 형상화 하였다. 내가 왜 왔나 내가 왜 왔나 우리 님 따라서 내 여기 왔지 우리 조선은 따뜻한데 그 땅에 못가고 내 여기 사나 우리 영감님은 어데로 갔나 나만 혼자 두고 자기만 갔네 강제징용의 땅 사할린에서 한인 1세대들이 고국을 그리며 부르는 망향의 노래 ‘사할린 아리랑’의 한 대목이다. 3연은 사할린에서 다시 일본땅으로 이중징용 가는 대목이다. 우리님 따라서 사할린에 왔는데, 다시 나만 혼자 두고 일본 해저 탄광으로 끌려가는 이산의 고난을 고하고 있다. 2부 '해원의 노래'에서는 서귀포아리랑보존회 유재희 회장과 박옥희가 제주아리랑을 선보였다. 이때 제주해녀의 복장을 한 장경숙(제주아리랑연구회장)의 제주 해녀의 고난과 역경을 몸짓으로 표현하며 제주아리랑을 함께 불러서 관객의 몰입도를 끌어내었다. 이어 김용자, 최순이, 박연춘이 상주아리랑, 진도아리랑. 강원도아리랑을 연곡으로 불러서 신명과 흥을 돋구웠다. 관객들이 후렴을 따라서 부르면서 손뼉을 치고 발을 굴리면서 추림새를 던져주었다. 얼쑤, 좋다! 3부 '상생의 노래'에서는 대일항쟁기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한 호국선열을 추모하는 의미로 만든 '아무르아리랑'이 소극으로 펼쳐져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무르아리랑 넘어간다.(후렴) 원수하고는 같은 하늘아래 살수가 없어, 팔걷고 뛰어나와 의병되었네, 동양평화 하자하자 외치는 소리 하늘땅 온세상 진동하누나 다섯발 내디뎌 도적 쓰러지니동양평화 대역사 시작되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아무르아리랑) 이 아리랑은 이혜솔 회장이 2018년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열리는 안둥근의사추모제에 한국대표로 초청되어 헌정한 의병아리랑이다. 국내 거주하고 있는 광주 고려인문화원 및 고려인합창단,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이 사는 인천, 김포, 양주 등에서 사할린아리랑과 함께 알려오고 있는 의병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오고 있다.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원들이 소극으로 만들어서 무대화 하여 레파토리화 하고 있다. 성동구 거주하는 한 보훈가족(75세)은 "보훈의 날을 맞이하여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해주는 '아무르아리랑'이 가슴에 와 닿는다. 주말이라서 마침 손자들과 같이 와서 더욱 의미가 깊다. 감사하다"라고 이회장의 손을 두손으로 잡아주었다. 휘날레가 끝났는데도 관객들이 계속해서 '앵콜'을 외쳐 주었다. 주말이라서 가족과 함께 온 모습이 화기애애하다. 전국아리랑공연연합회에서 축시를 보냈다. "우리 왕십리아리랑은 아리랑은 역사와 민족을 노래한다. 아리랑은 우리가 사는 땅을 노래한다. 왕십리아리랑은 서울의 역사를 노래한다 왕십리아리랑이 탄생한지 5년 이제 ‘아리랑의 아리랑’으로 자리한다 왕십리아리랑은 오늘의 우리 아리랑이다 구아리랑 긴아리랑 본조아리랑 정선아리랑 왕십리아리랑은 서울의 아리랑이다 이혜솔과 그들은 왕십리아리랑 전승자들이다 발표회를 하고 축제를 펼친다 제주도에서 정선까지 또 사할린까지 동포들과 외국 손님들과 우리들과 함께한다 아리랑의 역사를 아리랑의 위상을 아리랑의 세계화를 추동하는 막내 아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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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국악제 최우수상 수상한 전남문화재 '진도북춤'19일과 20일 양일간 펼쳐진 ‘제44회 남도국악제’에서 '진도북춤'(진도북춤보존회)이 종합 최우수상 수상했다. 특히 전라남도의 국악 발전을 위해 노력한 공로상 수상자로 (사)한국국악협회 진도군지부 김오현씨가 선정돼 진도군의 위상을 널리 알렸다. 한편 지난 1979년부터 시작된 남도국악제는 한국국악협회 전남도지회가 주최하고 전라남도 국악 전승 보전과 발전을 위해 매년 개최되고 있다. 개인 부문은 고수 부문 일반부 이임숙(대상), 박동식(우수상), 판소리 부문 조진옥(대상), 장구 부문 박연희(개인상)씨가 수상했다.단체 부문은 무용 부문 김해숙씨와 회원 7명(대상), 남도민요 부문 박영예씨와 회원 4명(최우수상), 농악 부문 김남용씨와 회원 46명(장려상)이 각각 수상했다. 제44회 전라남도 국악제 수상 결과는 다음과 같다. 종합 최우수상에는 (사)한국국악협회 진도군지부, 공로상 김오현. 무용 부문 대상에는 '유배지춤'을 출품한 김해숙 외 7인. 판소리 부문 신인부 대상에는 조진옥, 고수 부문 일반부 대상에는 이임숙. 일반부 우수상에는 박동식. 민요 부문 최우수상에는 박영예 외 4인, 농악 부문 장려상에는 김남용 외 47인, 개인상에는 박연희(장구)가 수상했다. 한국국악협회 진도군 지부(지부장:이희춘)가 작년에 이어 남도국악제에 재도전 했다. 1979년 시작된 남도국악제는 매년 1200명이 넘는 전남 국악인들이 한 자리에서 경연과 대동한마당 등을 펼치는 신명나는 전통음악 축제다. 올해는 한국국악협회 전라남도지회가 주최하고 장성군지부가 주관, 전라남도, 장성군, 한국국악협회, 전남예총이 후원한다. 2011년 이후 12년 만에 장성군에서 개최해 더욱 눈길을 끈다. 첫날 첫째 마당에는 고수, 남도민요, 판소리, 무용부문 예선 경연이 진행되고, 둘째 마당에는 농악 및 본선 경연, 개회식, 시상식, 축하공연 등 다채로운 순서가 관객들을 흥과 신명에 박수를 쳤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의 정수리 ‘국악’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게 될 제44회 남도국악제는 연령 제한 없는 무료 관람이다.한국국악협회 진도군지부장인 진도북춤보존회 이희춘 회장은 "오늘 최우수상 수상은 진도의 명물 '진도북춤'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하는 소중한 자리가 될 것”이라며 "경연대회를 통해서도 전국에서 진도북춤이 대중화 되는 길을 찾았다. 전국에서 참석하신 관객들에게 많은 박수를 받았다."고 수상소감을 전했다. 한편, 진도북놀이보존회는 1984년 2월 16일에 창립되었다. 이후 1987년 전라남도 지정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된 진도북춤은 전남 진도 지역에서 양손에 채를 쥐고 추는 춤으로, ‘진도북놀이’라고도 일컫는다. 북은 몸에 밀착시켜 어깨끈을 메고, 허리끈으로 조여 묶는다. 양손에 채를 쥐고 양쪽 모두 연주한다는 뜻에서 양북이라고도 하고, 채를 쌍으로 들고 춘다고 해서 쌍북이라고도 한다. 영남 지역과 서울 장안 큰 행사에서 진도북춤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 신명과 흥을 돋구는 진도북춤 군무가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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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아리랑의 문화유산과 문화재적 가치' 학술대회 성료"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경남 밀양문화관광재단은 지난 28일 창원컨벤션센터(CECO)에서 ‘밀양아리랑의 문화유산과 문화재적 가치’ 학술대회를 개최했다고 30일 밀양시가 밝혔다.‘밀양아리랑 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밀양아리랑이 갖는 고유의 가치와 문화유산으로서의 나아갈 방향에 관해 논의했다.밀양문화관광재단이 문화재청 후원을 받아 밀양아리랑 무형문화재 지정에 대해 학술적으로 논의한다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았다. 발표는 '문화유산과 무형문화재 그리고 밀양아리랑'을 주제로 △문화유산으로서의 아리랑 규칙과 서정의 원리(나경수 전남대학교 명예교수) △밀양아리랑의 음악적 전승 가치와 전망(서정매 동국대학교 외래교수) △밀양아리랑의 무형문화재적 가치확립 및 확산을 위한 교육현황연구(유선미 공주대학교 교수) △밀양아리랑 문화유산의 가치와 킬러콘텐츠(이창식 세명대학교 교수)에 대한 발제를 진행했다. 발표자들은 밀양아리랑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나경수 전남대학교 명예교수는 아리랑과 밀양·정선·진도 등 지역 아리랑의 문화유산 가치를 설명하면서 "밀양아리랑을 시도무형문화재가 아니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 하는 까닭은 여러 요인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서정매 동국대 외래교수는 "일제강점기에 발매된 밀양아리랑 음반을 모두 듣고 분류하여, 음반의 다양성과 대중화 된 까닭을 밝혔다. 또 6.25 전쟁 및 분단 이후 국내에서는 라선법 밀양아리랑이 전승되고 있는 데 비해, 연변과 북한에서는 라선법과 미선법이 공존하고 있음을 밝혔다. 아울러 밀양을 제외한 대부분의 다른 지역에서는 매우 한정된 가사로만 부르고 있으므로, 밀양지역이 베이스 캠프로서의 전승역할이 필요함"을 밝혔다. 유선미 공주대학교 교수는 "국악교육, 단순히 음악교육 차원이 아니라 문화교육 차원에서 밀양아리랑을 확산하는 교육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창식 세명대학교 교수는 "밀양아리랑은 한국 아리랑을 대표하면서 지역 정체성을 내포한 전형(典型)으로 무형문화재 지정 당위성을 가진다"고 평가했다. 이어진 종합토론은 좌장을 맡은 임돈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를 시작으로 박지애 창원대학교 교수, 이주영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박연희 가천대학교 교수, 박초연 진주교육대학교 교수가 참여해 밀양아리랑의 문화유산과 문화재적 가치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이 펼쳐졌다. 박일호 이사장은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밀양아리랑이 문화유산으로서 지켜나가야 할 가치와 방향성을 함께 만들어 나갈 중요한 시기다”며 "밀양아리랑은 밀양의 소중한 문화자산이자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유산으로 이에 걸맞은 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성장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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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남도풍속의 지형은 넓고도 깊다.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도 어렵고 풀어서 설명한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삼국시대의 향가로부터 오늘날의 가요까지, 영산강이며 섬진강에서 한라 백두까지 남도에서 발원하고 재구성된 문화들이 켜켜이 쌓이고 확산되었다. 이 스펙트럼을 가늠하기란 어린 날 운조리(망둥어) 잡으러 개옹에 나갔다가 잊어버린 검정고무신짝 찾는 일보다 어렵다. 전문적인 연구자라도 그럴진대 일반인들이야 말할 것이 없다. 그래서다. 어딘가 혹은 무엇인가 샘플이 필요하다. 다행이 우리는 다양한 장르가 국가의 강제나 지방정부의 요청에 의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하고 더러는 잔존 유산으로 남아있는 지역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진도다. 전국 유일이라고 말하면 다른 지역에서 오해하겠지만 인구 삼만 안팎의 작은 섬에 강강술래, 씻김굿, 다시래기, 만가, 들노래, 남도민요 등 십 수 개가 넘는 무형유산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탄탄하게 보존 전승되어 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중의 다섯 가지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내가 줄곧 주장해왔던 상가의 윷놀이나 유네스코 지정 매잡이 풍속 등은 거의 세간에 알려져 있지도 않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는 전통적인 통과의례, 씨줄날줄로 엮는 의례와 놀이, 들과 산과 바다에서 행하는 생업의 풍경들이며 그림과 글씨, 몸짓과 소리 예술들이 마치 한편의 소설을 축약해놓은 듯, 거대 보고서를 압축해놓은 듯 구성되어 있다. 우리 시대에 시, 서, 화, 창의 각 장르들을 이처럼 압축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을 갖고 있다는 점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즐겨 말해왔다. 남도풍속의 핵심을 보려면 진도를 보라. 진도지역 판소리 소사(小史), 이병기와 신치선에서 신영희까지 진도문화 중에서 그 위상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이 판소리다. 우리 판소리의 자존심이라는 김소희를 이어받은 인간문화재가 진도사람 신영희라는 점을 놓고 보면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 그 일단을 소개해두기로 한다. 판소리에 전념한 예인들로 박동준, 신치선, 이병기, 양상식, 허회, 최귀선 등을 들 수 있고, 고수로는 김득수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진도지역 판소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신영희의 부친 신치선과 이태백의 부친 이병기(본명 이병규)를 거론해야만 하다. 신치선은 1899년 전남 담양에서 신창연(申昌連)과 나주임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년을 담양에서 보내고 소년기는 목포에서 성장했다. 당시 명창이던 김정문(송만갑의 제자)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배웠다. 1920년대 20세에 협률사에 들어가 활동했다. 나이 40에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 정착하여 신영희를 낳았다. 1946년 임회면 석교리로 이사하여 진도사람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쳤다. 1948년 의신면 초사리로 옮겨 아들 하나를 더 두었다. 이때 제자들이 안득윤, 박연수, 박옥수, 신홍기, 신천행, 회동리의 허휘 등이었다. 제자 중 지산면 인지리의 박병두는 촉망받는 명창이었으나 1960년대에 요절했다. 초사리에서는 흥보가를 창극화하여 공연하기도 했다. 제자 안득윤은 군산, 인천 등지에서 크게 알려진 소리꾼으로 경기명창인 전숙희(全淑姬)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목포로 옮겨 안향년의 부친 안기선을 도와 목포 판소리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춘향전을 창극화하여 전국순회공연 및 만주공연 등을 했다. 1959년 지병의 악화로 타계했다. 이병기는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사람이다. 해방 직후 정의현이 설립한 진도 최초의 국악원에서 판소리 강사생활을 했다. 진도 전역을 돌며 판소리 강습 및 창극지도 및 활동을 했다. 특히 지산면 지역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다. 판소리 강습생이었던 이임례와 혼인하여 지금의 아쟁 명인 이태백을 낳았다. 이 스토리를 토대로 만든 것이 영화 '휘모리(1994년작)'다. 최근 국가지정 판소리 문화재로 지정된 이난초, 해남씻김굿 명인 이수자, 우수영 부녀요 보유자 이인자, 광주시 지정 판소리 문화재 이임례 등이 모두 형제 조카 사이다. 이병기 작곡이라고 전해지는 해물유희요 <빈지래기타령>을 포함하여 <숙영낭자전> <봄이 오면> 등이 전해진다. 진도사람 신영희는 김소희 수제자로 판소리 인간문화재가 된 국창이다. 1942년 2월 6일 지산면 인지리에서 신치선의 딸로 태어났다. 인지리에서 성장하다가 의신면 초사리로 이사하였고 다시 아버지를 따라 목포로 이주했다. 어려서 부친 신치선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이후 안향련의 부친 안기선, 정순임의 모친 장월중선, 이난초의 스승 강도근 등 수많은 명창에게 소리를 배웠다. 1975년에 서울에 올라가서 김소희에게 판소리를 배워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소희 문하에서 수업하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후보로 있다가 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다. 흔히 신영희, 안향련, 김동애를 판소리 삼걸이라고 했다. 1976년부터 국립창극단 단원, 1979년 연극'다시라기'로 배우 데뷔를 했다. KBS코미디 쇼비디오자키-쓰리랑부부(도창역)로 장기간 출연하여 판소리의 확장에 힘을 쓰기도 했다. 한승석, 주호종, 조유아 등 지금 한국을 휘두르고 있는 소장 소리꾼들 중 진도출신들이 50여명 된다. 여기에 트로트의 여왕으로 등극한 송가인까지 있으니 가히 소리의 고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진도는 육자배기나 흥타령, 진도아리랑 등 민요 전승이 활발하다. 대금․아쟁과 같은 기악전승 활동도 활발하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판소리가 진도 내의 독자적인 유파를 구성할 만큼 활발하게 전승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판소리를 배우고 익히는 자생적인 활동들이 활발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신치선, 이병기, 김득수 등이 소리선생으로 활동하면서 마을별로 아마추어 소리꾼들을 많이 양성했던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진도의 구비문학 및 국악 전승의 기반이 되었다. 국립국악원이 진도에 생기고, 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된 이유이도 하다. 이 지점에서 주목할 데가 진도신청이다. 판소리를 포함한 오늘날의 민속문화를 한군데 갈무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 민속문화의 정체를 확인하려면 남도로 와야 하고 남도 민속문화의 핵심을 보려면 진도로 가야하는데 그 중의 핵심이 신청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지금 진도에 신청 혹은 그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곳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까지 신청이 남아 있었고 그 기능을 하던 곳이 진도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지면상 자세한 얘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지만 지난 칼럼에서 나주신청 복원을 거론하며 자세하게 설명해두었으니 참고 가능하다. 전국적으로 보면 나주신청 복원에 이어 경기도가 <재인청>을 복원한다고 한다. 남도지역에서는 화순 능주, 장흥지역에서 움직임들이 일고 있다. 현재의 국립남도국악원이나 진도군립예술단의 수준하고는 결이 많이 다른 공간이다. 신청의 단순 복원이 아니라 미래지향적 열린 공간으로의 신청을 말하는 것이다. 교육과 체험과 체류와 힐링 등 본원적 노스탤지어로서의 안식이 발현되고 확장되는 그런 공간 말이다. 코로나 19이후 진도에 가면, 친정 딸 맞이하듯 명절에 막내아들 맞이하듯 맨발로 달려 나오시는 어머니와 남도지역 태내의 소리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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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최고의 공연, '임인진연' 알고보기15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프레스 리허설에서 '임인진연' 모습이 120년 만에 드러났다. 코로나19와 홍수 피해로 두 번이나 연기되었다. 그래서 연말 특집공연으로 더욱 기대가 컸다. 15시에 시작되어 100여 분에 걸친 완벽한 시연이 있었다. 고종 황제 당시 진연(進宴, 궁중잔치)은 공식적 행사를 올린 ‘외진연’과 ‘내진연’으로 나뉘어 행해졌다. 이번 공연에서는 예술성이 강한 ‘내진연’을 축소하여 무대 공연으로 재구성했다. 1902년 내진연을 재현하는 것은 이번이 최초다. 막이 내린 후에는 김영운 원장과 박동우 총연출과 기자들의 질의 시간도 있었다. 이번 공연은 재현에 따른 학술적 접근이나 무대의 정밀함이나 출연자들의 전문성에서 국립국악원만이 해낼 수 있는 공연이란 점에서 최고의 공연으로 평가 받을만하다. 시연과 질의를 통해 드러난 이해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 몇 가지가 있다. Q. 왜 오늘날 '임인진연' 행사를 공연무대로 재현했나? A. 대한제국의 1902년은 120년 전 ‘임인년’이다. 120년이란 정주년을 맞은 것에 주목하여 재현의 당위성에 무게를 실었다. 500년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를 포함한 마지막 궁중의례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궁중잔치'라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나 국악사나 공연사 측면에서 재현(Representation)의 의미가 있다. Q.1902년 임인년 당시 내세운 주제의식 또는 목적은 무엇이었나? A. 황태자의 다섯 차례에 걸친 간청은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과 나이 60을 바라보는 망륙(望六)인 51세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제1명분이다. 제2명분은 급변하는 개화기에 국제적으로 황실의 위엄을 세우고 내부적으로는 군신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확립하려는 목적의 대외적 과시이다. 무대 중앙에는 대한제국 태극기가 게시된 점이 이를 시사한다. Q. 당시 어좌(御座)에 앉아서 임인진연을 바라보는 고종황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A.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일본에 박탈당한 '을사늑약'을 3년 앞둔 시점이었다. 고종은 나라를 지키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전신·전화·전등·전차 4대 근대시설을 일본보다 3년 먼저 도입했다. 아시아에서는 첫번째로 4대 근대시설을 받아들인 셈이다. 그리고 해외열강 11개국을 초청, 즉위 40주년 기념칭경예식'을 준비했다. 자주국가 대한제국의 위상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콜레라 유행, 행사 개최장소인 중화전 완공 지연으로 잔치가 2차례 연기됐다. 그 여파로 국제행사는 치르지 못하고, 국내 행사인 '진연'만 행해졌다. 망국의 시기가 엄습하는 가운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절치부심에 고심한 고종황제의 절절함이 느껴진다. Q. 당시의 실제 궁중잔치와 이번 재창조 된 무대화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A. 당시의 진연은 크게 남성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인 행사를 올린 ‘외진연’과 황태자와 황태자비, 군부인, 좌․우명부, 종친 등과 함께한 ‘내진연’으로 나뉘어 행해졌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예술적인 측면이 강한 ‘내진연’을 무대 공연으로 재구성하였다. 주목되는 변화는 황제의 어좌로 설정해 관객이 황제의 시선에서 진연을 마주할 수 있도록 시야를 설정, 진행한다는 점이다. Q. 임인진연은 어떤 사료를 근거로 삼아 재현했나? A.당시 국가를 상징하는 황실의 진연이 기록된 ‘진연의궤’와 ‘임인진연도병’(圖屏, 덕수궁 관명전 그린 병풍)’ 등 당대의 기록 유산에 근거해 전통 방식으로 되살렸다. 박연출은 "공연을 준비하면서 놀란 점은 당시의 기록이다. '임인진연의궤'행사 준비에 필요한 모든 내용들이 글과 그림으로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의 어떠한 공연팀도 이 정도로 완벽한 기록을 남기지는 못한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록화 ‘임인진연도병’에는 당시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고 전했다. Q.당시 야외 행사인 덕수궁 광면전을 어떻게 무대화 했나? A.주렴(朱簾, 붉은 대나무발)과 사방으로 둘러쳐진 황색 휘장막 등을 활용한 무대장치는 황제의 공간과 무용, 음악의 공간을 구분하여 실제 진연의 사실감과 생생함을 높였다. Q. 당시 임인진연 의례에서 연희되었던 음악과 무용에 대해서는? 몇명의 악공이 어떤 악기로 연주했나? 연주의 규모는? A. 첫곡 강락지곡에서 마지막 곡 '태평춘지곡'까지 총 65곡이 연주되고 불려졌다. 악공(악사)는 총 113명이고, 악기는 편종,편경 등 30종이다. 277명의 무용수가 20개 종목 무용을 선보였다. 봉래의, 헌선도, 몽금척, 연백복지무, 수연장, 제수창, 무고, 가인전목단,경풍도, 사선무, 춘앵전, 학무, 연화대무, 향령무, 육화대, 만수무, 장생보연지무, 포구락, 선유락, 검기무이다. 아침부터 해가 질때까지 음식을 올렸던 절차까지 합하면 9시간 이상 연희가 이어졌을 것이다. Q. 재현의 중심, 공연화한 순서와 구체적 공연 상황은 무엇인가? A. 중심적인 의례는 예법대로 황제에게 일곱 차례 술잔을 올린다. 이 과정에 국립국악원 정악단과 무용단이 궁중무용 29종목 중 5개 종목 봉래의, 헌선도, 몽금척, 향령무, 선유락이 선보이고, 궁중음악으로는 보허자, 낙양춘, 해령, 본령,수제천, 헌천수 등을 감상할 수 있다. 황제의 장수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무대를 꾸민다. Q. 당시 행사에서 이번에 전적으로 생략된 부분은? A. 김영운 원장은 "당시 실제 행사는 오전 9시 쯤 시작하여 일몰까지였다. 또한 잔치임으로 음식을 올리는 절차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연 예술로 접할 수 있는 작품성에 주목하여 재현을 목적으로 과감하게 생략하였다."라고 말했다. 박 연출은 "이번 공연은 1902년 의례와 비교했을 때 규모를 6분지 1로 축소했다.당시 상차림 음식을 담은 총 그릇수는 18,132개다. 음식을 올리는 절차를 생략했고, 등장하는 춤은 29개 종목에서 5종목을 선정해서 선보였다. 공연 시간은 100분이 소요된다. 진연의궤와 임인진연도병 등 당대 기록유산을 기본 텍스트로 하여 재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 당시 행사 진행요원이 493명, 무용수가 277명이나 됐던 규모에는 못 미치지만 최대한 그때 분위기와 정서를 살리려고 했다"고 답했다. Q. 특히 이번 무대와 객석의 시선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객석을 황제의 어좌로 설정해서 관객이 황제의 시선에서 진연을 본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에 대한 연출가의 의도는? A. 박동우 연출은 "대한제국이 황제의 국가였다면 대한민국은 국민의 국가다. 그래서 관객의 시선이 황제의 자리에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고 말했다. 객석을 황제가 앉는 ‘어좌’로 설정한 것이다. 황제의 시선에서 진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무대를 꾸몄다. Q. 마지작 휘날레를 장식한 정재 '선유락'은 어떤 작품인가? A. 채선(彩船)을 설치하고 여령들이 나눠 서서 화려하게 장식한 배를 띄우라는 영이 들리면 어부의 심정을 담은 어부사를 노래하며 밧줄을 끌며 배를 둘러서서 춤을 춘다. 신라의 뱃놀이에 기원한 조선시대 정재이다. 지방 교방의 춤이 정조대에 궁중예술로 유입된 것으로, 궁중 큰잔치에 빠질 수 없는 레파토리로 군무의 화려한 춤사위가 원을 그리며 돈다. 도입부분에서 취타대가 나와서 시작을 알린다. 반주음악은 취타이며 악기는 징·북·호적·자바라·나발로 편성되고 어부사 사설은 다음과 같다. 머리 센 어부가 갯가에 살면서 물가에 사는 게 산에 사는 것보다 낫다 하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아침에 빠진 물이 저녁 되니 밀려오네 Q.기자 간담회,답변의 결론은? A.김영운 원장은 "120년 전 자주국가를 염원했던 대한제국의 찬란한 궁중의례의 진면목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소중한 문화유산의 가치와 문화를 통한 화합의 정신이 널리 전해지길 바란다.”고 했다. 박동우 연출은 "대한제국이라는 시대적 정서와 궁중예술의 아름다움을 전통 방식으로 무대에 재현하고자 했다.”고 밝히며 "황제의 시선으로 구성한 이번 공연을 통해 많은 관객들이 궁중예술의 멋을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춤과 노래, 의례가 삼위일체 되는 공연이다라"고 밝혔다. Q. 이번 공연 티켓은 거의 매진된 상태이다. 국립국악원에서나 할 수 있는 있는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더 볼 수 있나? A. 김영운 원장은 "가능한 한 내년에도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려서 더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덧붙인다면 임인진연 무대에서 궁중의례과 함께 연희자들의 화려한 한복 의상의 선과 색깔이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잠시 정지되어 있는 그 모습도 찬란한 빛이 발했다. 오늘 우리는 자랑스런 '위대한 유산'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내년에도 다시 한번 만나기를 고대한다. 국립국악원 송년공연 ‘임인진연’은 8세 이상 관람 가능하며,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12월 16일(금)부터 21일(수)까지 주중에는 오후 7시 30분, 주말에는 오후 3시에 진행한다. 공연 예매는 국립국악원 홈페이지(www.gugak.go.kr)와 전화(02-580-3300)로 가능하다. R석 5만원, S석 3만원, A석 2만원, B석 1만원 (문의 02-580-3300, 19일(월)은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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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 국악WAY 앱 출시'누구나 쉽게 기초 국악 강좌를 비대면으로 수강할 수 있는 ‘영동 국악 웨이(WAY)’가 출시됐다. 28일 충북 영동군에 따르면 ‘영동 국악 WAY’는 문화체육관광부(콘텐츠진흥원)와 충청북도가 지원한 ‘2022년 충북지역특화콘텐츠개발지원사업’의 선정작으로 (주)핀사이트(대표 정진업)에서 기획, 제작했다. ‘영동 국악 WAY’는 포도와 감 등 과일의 고장 레인보우 충북 영동의 자연이 배출한 걸출한 역사적 위인, 3대 악성(樂聖) 난계 박연 선생의 발자취와 국악의 향기를 따라 간다. 영동이 보유한 다양한 국악 관련 문화자원을 탐방하고 AR 보물찾기와 미니게임 등을 즐기면서, 자연스레 박연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국악의 기준 음률과 악보 체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 서비스이다. 한국 국악의 기준음계(황종률)와 악보(정간보) 그리고 도량형의 기틀까지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 박연 선생의 생애를 ‘박연의 길’이란 주제로 다루고 있으며, 난계국악박물관과 난계사, 옥계폭포 등 박연 선생과 관련된 영동의 문화관광자원을 직접 방문해 다양한 정보를 재미있는 이벤트를 통해 배우고 기초 대금 강좌를 무료로 수강할 수 있다. 서비스 오픈에 맞춰, 영동의 특산품 ‘영동와인’과 국악기 미니어처 등의 상품에 응모할 수 있는 다채로운 이벤트도 준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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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대사습뎐(傳), 국악 진수 서울에서 펼치다지난 13일 ‘2022 전주대사습뎐(傳)’이 국립극장 하늘극장 나들이를 했다. 역대 수상자, 국내 최고의 명인·명창들이 총 출연했다.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가 주최하고 전주시와 전주대사습청이 주관하는 이번 공연은 국내 대표적인 국악대회 중 하나인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를 대중에게 알리고, 수상자들의 왕성한 활동 장려 및 국악의 대중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취지를 가진다. 조선 후기까지 이어오던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는 일제강점기 잠시 단절되다가 1975년 복원되어 올해 9월 5일 48회를 맞으며 새로운 명인·명창을 배출해냈다. 정읍시립국악단 김용호 단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공연은 남도민요, 한량무, 판소리, 가야금병창, 살풀이 춤, 시조, 승무, 경기민요, 단막창극 등 다양한 국악 분야를 선보였으며, 역대 장원자들은 물론, 국내 최고 전통예술인들이 함께 하며 고품격 무대를 펼쳤다. 첫 무대는 김차경, 강경아, 김미숙, 최영인, 정수인, 이지숙, 양혜인 여성 명창들의 남도민요 ‘흥타령’, ‘동해바다’로 문을 열었다. 역대 대통령상 수상자들의 무대는 과연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넘치는 신명과 흥으로 객석은 들썩이기 시작했다. 창자들은 여유로운 미소와 눈맞춤으로 관객들과 교감했다. 이어지는 이서윤 명무의 ‘한량무’는 남성 무용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섬세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춤사위로 보는 이들을 집중케 했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가벼운 발동작 끝자락에 스치듯 지나치는 남성의 버선코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올해 ‘제48회 전주대사습전국대회’ 명창부 대상(대통령상)을 차지한 박현영 명창은 본인의 장원 수상곡인 ‘적벽가 중 조자룡 활 쏘는 대목’으로 다시 한번 탄탄한 공력을 발휘했다. 적벽가 특유의 힘 있고 박진감 넘치는 극적 전개를 훌륭하게 소화해내면서도, 이제는 경연이 아닌 관객과 호흡하는 무대에서 자신만의 색채를 가미한 열창으로 관객의 환호를 이끌었다. 강정숙(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 명인과 이정아, 박연하 명인은 가야금병창 ‘호남가’, ‘심청가 중 방아타령’을 선보였다. 명인들은 12줄 전통 가야금의 깊고도 맑은 울림을 곡에 녹이며, 풍부한 성량과 감성으로 무대를 가득 채웠으며, 노장 강정숙 명인의 노련한 연주와 소리는 곡의 감성을 청중에게 오롯이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방아 더 빨리 찧읍시다.”라며 관객과 호흡하려는 노장의 열정에 듣는 이는 곡에 더욱 몰입한다. 청중을 향한 미소를 잊지 않으면서도, 연주와 소리 이중의 감성을 오가며 집중을 소화해내는 그들의 에너지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가야금 3대와 장구1대의 연주는 깊고도 맑은 가야금 특유의 가락과 장구의 장단이 어우러져 관현악 없이도 음악적 풍부함을 자랑했다. 이어, 사회자는 ‘살풀이 춤’을 선보일 정명숙(국가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 명인의 소개 말미에 ‘88세’라고 밝히며, 관객들의 감탄과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그녀의 작지만 야무진 몸체와 시선은 시종일관 거의 정해진 각도만을 향해 있고, 손과 발의 섬세하고도 절제된 움직임으로 하나의 몸짓을 완성한다. 최소한의 가락과 장단만으로 명인은 그렇게 우리의 한을 몸으로 노래했다. 보는 이도 숨죽이고 집중한다. 무엇보다 연세 90을 바라보는 노장의 수십 년 춤의 여정이 녹아든 표정과 연륜의 주름은 그녀의 춤에서만이 줄 수 있는 깊은 감동이다. 이어 장영이 명창은 엮음지름시조 ‘푸른 산중 하에’로 시조의 멋과 맛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호흡이 길고 음역대가 급격하여 운율 담아 읊어 내기에는 상당한 집중과 에너지가 요구되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여유롭게 소화하며 객석을 집중케 했다. 시조 특유의 문학적·음악적 색채를 한껏 즐길 수 있는 무대였다. 김수연(국가무형문화제 제5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 명인의 수궁가는 힘과 흥이 고루 펼쳐지고, 발음 또한 정확하여 관객은 명인의 흥과 멋을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이번 무대 역시 명인은 ‘단가 어화세상’, ‘수궁가 중 범피중류’를 통해 그러한 매력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또한 ‘별주부가 토끼를 꾀어 용궁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의 노련한 연기는 특유의 해학과 재미를 더해 관객의 추임새와 호응을 불러일으키며 무대를 사로잡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무대는 고정훈 명고가 함께 했다. 이어지는 무대는 전통의 삶과 예술이 녹아 있는 몸의 예술 승무이다. 채향순(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 명무는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하는 빼어나면서도 절제된 춤사위로 승무의 기승전결을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염불과장에서는 세상의 모든 기운을 말하듯 느리고도 포용적이지만, 타령과장, 굿거리과장으로 갈수록 다양한 삶의 모습과 군상을 말하듯, 장단은 빠르고 경쾌해진다. 빠른 장단에서 보여주는 손과 발의 주고받는 듯한 호흡은 긴박함을 완성해간다. 법고과장에 이르러 명무의 북채는 북과 만나고, 그 두드림은 북의 장단과 가락을 만들어내며 심장을 울리는 듯한 강렬함으로 관객은 삶의 정점을 만나게 된다. 함께 하는 관현악단의 연주는 음정과 박자 그 이상의 언어로 그 강렬함에 힘을 더했다. 승무의 백미 법고과장에서 관객은 승무만이 주는 감격의 최고조를 경험했다. 이호연(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전승교육사) 명창과 이소정, 채수현, 김빛여울, 이덕용 명창은 경기민요 ‘정선아리랑’, ‘한오백년’, ‘신고산타령’, ‘궁초댕기’를 선보이며 객석의 흥을 다시 돋우었다. 경기민요 특유의 경쾌함과 맑은 음색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이호연 명창의 연륜이 묻어나는 여유롭고도 깊은 음색은 경기민요의 깊은 매력에 빠져들게 했다. 이어진 단막창극 ‘흥보가 중 흥보 뺨 맞는 대목’은 관객에게 가장 많은 웃음을 선사하며, 객석과의 유쾌한 호흡을 자랑했다. 흥보역을 맡은 송재영((사)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 제29회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장원)명창을 필두로, 국내 창극계를 대표하는 김학용(마당쇠 역), 김차경(놀보처 역) 명인, 그리고 젊은 실력파 소리꾼 최용석(놀보 역) 명창의 찰진 연기와 인물간의 호흡, 극적 감성을 녹여내는 농익은 소리, 그리고 해학과 재미를 곁들인 대사와 구성은 실내 객석을 야외 마당놀이 한 장면으로 바꾸어 놓았다. 흥보의 애절한 소리에 관객은 애처로워했으며, 놀부의 탐욕에 질책하거나, 마당쇠의 익살과 인간미에 넋을 놓고 빠져들었다. 마지막 무대는 국악의 미래를 이끌어 갈 젊은 명창들이 장식했다. 박현영, 정승준, 조정규, 박상훈, 정진성 명창들의 남도민요 ‘성주풀이’, ‘삼산은 반락’, ‘개구리타령’은 앞서 선보였던 여성 명창들과는 색다른 매력의 남도민요를 보여주었다. 탄탄한 실력을 갖춘 젊은 명창들의 힘찬 무대가 다시 한 번 객석의 흥을 돋우었으며,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전통음악이 젊은 소리꾼들에 의해 불리는 색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국립극장 하늘극장은 특성상 무대를 둘러싸는 원형의 객석의 구조를 갖추고 있어, 객석과 무대가 상당히 가까워 마당극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관객은 공연자들의 노래, 춤, 연주는 물론 표정까지 읽으며 밀착된 감상이 가능했기에 더욱 뜨거운 호응과 추임새를 더해주었다. 무대를 가득 채웠던 명인·명창들 역시 객석의 진심어린 격려와 호응에 힘입어 더욱 열정적인 무대를 완성할 수 있었다. 공연의 총 연출을 맡은 (사)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송재영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코로나로 인해 생활이 여전히 침체된 상황이지만, 관객 분들이 공연 보시고 많이 즐거워하시고, 가슴 답답한 것들이 해소되시는 것 같아서 행복합니다. 이번 공연은 원로 명인 분들과 차세대 유망주, 장원자들로 구성되어 함께 무대를 꾸민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처음으로 유료 공연을 시도했습니다. 출연자 분들도 음악적으로 수준 높은 분들로 구성했는데요, 다행히 반응이 너무 좋아서 표가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이번 경험으로, ‘국악공연은 무료’라는 인식에서 탈피해서, 공연의 질을 높여가면서 유료화한다면, 관객 분들도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국악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면서, 국악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주대사습놀이’가 대중에게 많이 익숙한 대회이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알리려고 합니다. 앞으로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을 순회하면서, 지방 큰 도시에서도 공연할 계획입니다.” 올해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는 48회를 맞았다. ‘대사습(大私習)’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에 남겨진 역사만으로도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975년에 부활된 대회만으로도 현재 전국규모의 대회 중에는 깊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전주가 국악의 고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주대사습놀이’라는 문화가 그 중심에 있었으며, 이것은 소리를 아끼고 향유하는 전주의 예인들과 시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인·명창들을 배출하고, 국악 보존을 넘어 국악 세계화를 꿈꾸는 ‘전주대사습놀이’가 내년에는 어떤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올지 기대된다. ‘2022 전주대사습뎐(傳)’ 공연은 국악방송 TV를 통해 추후 방영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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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소설 ‘흙의 소리’, 육필과 원화 特別展국악신문 111주 연재소설 ‘흙의 소리’가 2020년 9월 10일 첫 회 게재를 시작으로 2022년 10월 20일자로 2년 여에 걸친 연재를 마감했다. 전시된 작가 이동희의 육필 원고지, 소설의 시작은 청명한 피리소리가 첫막을 연다. "피리소리가 들리었다. 산 속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곱고 부르럽고 애절하게 그리고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맑은 가락의 소리였다. 어머니 묘 앞 여막(廬幕)에서 박연(朴堧)이 부르는 피리 소리였다.” 이 첫 회의 내용을 이무성 화백의 채색 삽화 한 컷이 압축하였다. 호랑이 한 마리를 등 뒤에 두고 상복을 입은 아들 박연이 어머니 묘 앞에 앉아 피리를 부는 모습이다. 주변에는 여막과 소나무가 묘역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111회 최종회는 이렇게 맺었다. "박연의 생애는 한마디로 큰 소나무 아래 불고 있는 맑은 바람소리 같은 것이었다. 흙의 소리였다. 아련한·····.”라고 끝을 맺었다. 연재를 시작하며 쓴 "진정한 의미의 흙은 눈물의 테마이고 아픔과 그리움의 테마이다. 흙의 소리는 어린 시절 보리피리 곡조처럼 흙으로 빚은 오카리나 소리처럼 아련한 그리움이다.”라고 한 아련한 '흙의 소리'로 끝맺었다. 이 마지막 장면을 이무성 화백은 한 그루 위엄 있는 장송(長松)을 감싸고 있는 흙의 '소리'들을 크고 작은 글씨, 한자와 한글의 다양한 서체로 채워 박연의 연대기를 한그루 소나무로 표현하였다. 작가에게 연재하는 기간은 그 시간만큼의 감옥살이다. 옥살이의 결과인 작품 장편소설 ‘흙의 소리’는 악성 난계 박연의 생애와 업적과 함께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난계 박연은 ‘흙의 소리’로 하여, ‘흙의 소리’는 난계 박연으로 하여·····. 화가 이무성 화백은 미술계와 국악 분야 음반계와 공연계의 실무를 담당한 경력의 원로이다. 서라벌미술동문회원(밀알회원)으로 1959부터 지금까지 동문전에 출품하고 있다. 그리고 (주)스타원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와 (사)한국전통가요진흥협회 이사를 엮임했다. 주요 작품전은 2011부터 2016꺼지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 10권의 삽화와 표지 작업을 했고, 2012부터 2014까지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인사동 갤러리 올)과 이어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제1회 시화전’(도쿄 고려박물관),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을 호주시드니 한국문화원과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개최했다. 2020년 9월부터 2년여의 111회 동안 국악신문 연재 장편소설 ‘흙의 소리’ 삽화 작업을 하였다. 작가 이동희 선생은 교수, 작가, 문학관 운영자로 원로 문인이다. 1963 ‘자유문학’에 소설 당선을 시작으로 1965 단국중공고 교사, 단국대 교수 문과대학장 역임하였다. 한국농민문학회 회장, 한국크리스천문학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회장,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이사,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등의 활동을 하였다. ‘흙의문학상’, 한국문학상, PEN문학상, 월탄문학상, 무영문학상, 농촌문화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외 수상을 했다. 창작집 ‘地下水’ ‘비어 있는 집’ ‘흙바람 속으로’ ‘장수바위’ 장편소설 ‘赤과 藍’ ‘땅과 흙’ ‘단군의 나라’ ‘서러운 땅 서러운 혼’ ‘노근리 아리랑’ ‘흙에서 만나다’ ‘농민21-벼꽃 질 무렵’이 있다. 또한 수필집 ‘빈 들에서 부는 바람’과 논문집 ‘흙과 삶의 미학’ 등이 있다. 현재 단국대 명예교수, ‘농민문학’발행인, 농민문학기념관 농민문학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